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을 따라
정말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다양한 곳에서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씁니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 나의 연인, 가족, 친구들에 대한 사랑, 종교에 대한 사랑, 나의 나라에 대한 사랑, 타국에 대한 사랑, 전 인류를 아끼는 사랑.. 등 정말 많은 '사랑'에 대하여 강연을 하고 바이블 같은 책을 씁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저명한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우리에게 소중한 질문을 던져주십니다.
사랑을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사랑만이 있을 뿐인가? 하나에 대한 것만 사랑이고 다수에 대한 것은 사랑이 아닌가? 만일 내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는 것인가? 사랑은 도덕적인가? 가족적인가 비가족적인가? 당신은 전 인류를 사랑하면서 특수한 개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감정인가 정서인가? 사랑은 쾌락이고 욕망인가? 이 모든 질문은 우리가 사랑에 관한 관념을 갖고 있으며, 사랑이 어떠해야 하고 어떠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의해 발전되어 온 패턴이나 관계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p.126
어떤 것을 '그래야 하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나누는 것은 삶을 다루는 가장 기만적인 방법이다.
적어도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있는 그대로의 것'에서 자꾸만 '그래야 하는 것'으로 향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것들을 덧붙이고, 또 붙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탓하고 책망할 때가 있으며, 또 타인에게도 실망하고 그 실망한 마음을 퍼붓는 일이 있는 것이겠지요.
물론 어떠한 '발전'을 위해서 이런 이상향을 좇는 일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더 나아지기 위해, 더 건설적이고 훨씬 더 개선된 모습을 위해서 달려갈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한번, 이를 위한 과정, 그 나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부정하며 그 이상향만 바라보느라 고개를 꺾어 올리고 있다면 우리를 보살필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을 거예요. 현재의 모습을 부정하지 않고, 또 다른 모습으로 인정해주면서 "어,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나아가 보는 건 어떨까?" 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현재의 모습을 '부정'하며 인정하려 들 지 않는 자세는 그 무엇도 나아지게 할 수 없어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목적지만 바라보고 있다면, 당연히 '어떻게' 가야 할지 감도 안 잡힐 테니까요. 현재를 부정하면서 이상향에 집착만 한다면 스스로 이상향에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본인에게 계속 알려주는 상황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주 쉬운 예로, 내가 지금 물을 너무 마시고 싶은데 물이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아, 물이 너무 마시고 싶어. 나는 지금 물이 없어, 이거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명확하게 아니야. 물이 너무너무 마시고 싶단 말이야!"라는 말을 계속한다면 물이 뚝딱 만들어지나요? 저런 말을 계- 속 한다면 아마 한 두 모금 마시고 싶었던 갈증이 물을 2L를 들이키고 싶은 심한 갈증으로 변할 거예요. 저런 것보다는 "아, 물이 좀 마시고 싶은데 물이 없네? 얼른 하던 거 마저 다 끝내고 물 마실 수 있게 되면 좋겠다." 하는 편이 나을 거예요.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요 :-)
나의 부정은 부정을 키우고, 이상향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킬 뿐이라는 걸 명심하면 아마 삶의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겁니다. 나 자신과, 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