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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뮤즈 Jan 12. 2019

그녀의 사랑을 등대 삼아

더 많은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

학교가 바빠 집에 잘 내려오지 못하는 오빠를 보기 위해 방학 중이었던 나는 오빠의 서울 자취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또 지하철을 타서 오빠의 학교 앞 역에 내렸다. 대학교 입구역이라 그런지, 지하철역 내부에는 많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앞에서 해맑게 손을 흔들고 있는, 나를 마중 나온 오빠를 찾아 잘 지냈냐고, 왜 이리 바쁘냐고 재잘재잘 대며 두 번째 출구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분이 있었다.

바로, 출구에서 나가자마자 시작되는 시장거리의 모퉁이에 앉아 나물을 팔고 계신 할머니였다. 


추운 날씨에 얇은 실 옷 하나만 입으시고는 가녀린 손목으로 나물을 다듬고 계셨다.

돌돌 말아서 걷어 올린 옷의 소매가 할머니의 손목에는 너무나 무거워 보였다. 


오빠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나친 지 오래된 할머니 쪽을 살짝 고개를 돌려 계속 보았다.


갑자기 그 순간,

"아, 찾았다!"

오빠가 씩 웃어 보였다. 오천 원과 천 원짜리가 꼬깃꼬깃 접혀있었다. 

왜 저렇게 걷기 불편하게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오빠의 손은 빠르게 현금을 찾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집에 나물이 필요하다며 그 할머니 쪽으로 가더니 

시금치에, 숙주나물에, 이름 모를 이파리까지 샀다. 확신하건대 오빠도 분명 그 잎이 뭔지 모르고 사는 걸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빠가 자취방에서 나물을 해 먹는다고? 내가 갸우뚱할 수밖에. 


할머니께서는 환하게 웃어 보이시며

"학생, 이거 내가 오늘 아침에 뒷산에서 직접 따와서 아주 싱싱한거여. 맛나게 먹었음 좋겠구만."

말씀하셨다.  

"네 정말 그래 보여요, 아이고 너무 많이 담아주시네요. 저 바로 요 앞에 사니까 자주 올게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여 

이런 오빠가 내 친오빠라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또 했다. 



오빠와 나, 우리 남매는 친할머니와 함께 20년 가까이 살았다. 우리 둘 다 고등학교를 기숙사 학교로 가고 대학교에 가면서 자취생활을 시작하기 이전까지는 항상 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자취생활을 할 때에도 본가에 가면 항상 할머니가 계셨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덕에, 나는 이 세상 모든 노인분들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산다. 그리고 노인분들께 예의를 갖추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유난히 더 속이 쓰리고 기분이 상한다. 오빠와 직접적으로 이에 대해 얘기해본 적은 없지만, 오빠도 아마 나와 똑같은 감정과 생각을 갖고 사는 것 같다. 


사람은 입을 통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눈빛, 몸짓, 걸음걸이 -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언어들이다.

그리고 오빠의 그 행동 언어들을 통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남매는 노인분들에게서 이제는 곁에 계시지 않는 우리 할머니를 본다.

다 우리 할머니와 같은, 우리 할머니의 친구분들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공경하고 예의를 갖추며 젊은이로서 체력적으로나 혹은 뭐든 간에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다 도와드린다. 밥을 먹는 일처럼 당연하다. 


할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온 손주들, 더 챙겨줄 준비물은 없나 가방 속을 꼼꼼히 들여다보시는 일을, 우리가 할머니보다도 키가 더 훌쩍 컸을 때에도 계속하셨다. 많이 먹어도 더 먹으라며 맛있는 반찬을 우리 쪽에 놓아주시고 뭘 안 해도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있을 수 있을까'하는 눈빛으로 바라봐 주셨다. 할머니의 그런 사랑은 우리의 내면에서 스스로의 두터운 자존감을 확립하는 데에 정말로 중요하고 소중한 거름이 되었다. 


그런 할머니의 사랑을 등대 삼아, 

우리도 더욱더 따스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께 사랑을 나눠드리고자 한다. 


이것은 분명 우리 남매에게 무엇보다도 큰 동기부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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