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영, 기대해도 좋을 거야.
오늘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거든.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근무일이었다.
매니저가 나한테 다가오더니, 오늘 잔뜩 기대하고 있으라고 했다.
'맛있는 초콜릿을 주려나?'
'손님이 나를 칭찬하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나?'
'오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쏘려나?'
'데이 오프를 주려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서프라이즈 요소들을 떠올려봐도, 매니저가 직접 기대하라고 말할 만큼의 놀라운 일들은 아닌 듯했다. (데이 오프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잠깐 기대만 해봤다.)
오전 10시가 되었고, 그날은 크루즈 안 모든 승무원들이 참석하는 All crew meeting (전 직원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각 부서에 스텐바이 할 사람 1-2명만 남겨두고는 모두가 참가해야 하는 중요한 회의이다.
나는 당연히 데스크 커버라고 생각을 했고(내 스케줄 상에도 데스크 커버하라고 되어 있었고) 자연스럽게 Front desk로 나가 동료들을 회의장에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매니저가 와서
"나영, 너 오늘 데스크 커버 안 해도 돼"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매니저가 말한 서프라이즈였나?'
사실 데스크 커버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계속 서 있어야 하고, 혼자서 근무하니 심심하기도 하고, 승객이 주로 부두에서 관광하러 나간 사이에 회의가 열리는 거라, 특별히 할 일은 없지만, 한 달에 한번 열리는 회의인 만큼 참가도 하고 싶고, 편안한 대극장 의자에 앉을 수 있으니 다리도 안 아프고, 전체 승무원들이 다 참가하니 만나서 수다도 떨 수 있어서 회의에 참석하는 걸 더 좋아라 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난 데스크 커버를 빼준 것이 오늘 매니저의 서프라이즈라고 생각했지, 다른 서프라이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나 오늘 데스크 커버 안해도 되? 이게 서프라이즈야? 히히 고마워. "
매니저는 내말에 의미심장한 웃음만 보였다.
전 직원이 4층 대극장에 모였고, 인사부장의 인사말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내가 속한 크루즈 회사는 총 24척의 크루즈 선박을 보유한 한 회사이지만, 각 크루즈 선박은 각기 다른 개체로 운항하며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한다.
매 항차의 마지막 날에는 승객들에게 크루즈를 평가할 수 있는 고객만족도 조사 설문지가 주어지고, 설문지의 결과에 따라 크루즈 선박별로 점수를 매기고, 순위가 결정되는데, 매월 전 직원회의에서 결과를 알려주며, 크루즈 선박의 순위를 알아가는 재미도 솔솔 하다. 레전드호는 늘 1-2위를 다투는 선박이였는데, 우리가 근무하는 크루즈가 상위권에 머문다는 사실은 전 직원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기도 한다.
또한 회의 중에는 승무원들의 재능도 볼 수 있는 공연도 볼 수 있으며, 승무원들이 즐길 수 있는 근무 외 액티비티 월간 스케줄 및 앞으로의 크루즈의 운항 노선 등 알아두어야 할 정보들을 안내해준다.
이 이외에도 시상식이 열리는데 전 직원회의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다.
각 부서별로 매니저들의 추천을 받거나, 동료들의 추천을 받은 승무원에게 캡틴이 '이달의 우수 직원(Employee of the Month)'상을 수여한다. 나 역시 이달의 우수직원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3년간 총 3번을 받았었는데, 첫 번째는 승객들이 설문지에 나에 대한 좋은 코멘트를 남겨주셔서 덕분에 상을 받을 수 있었고, 두 번째는 한국인 승객들이 매 항차별로 200-300명씩 승선하시는 석 달 동안 동안 밤을 새우며 컴퍼스(Compass, 선상신문)를 만들었더니 수고했다며 주셨고, 세 번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APEC 정상회담을 마무리하고 그 노력의 결과로 받은 상이었다.
수상자가 부서별로 한 명씩 호명되었고, 호명된 승무원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캡틴에게 상을 받았다. 이름이 호명되자 누구보다 밝게 웃으며 무대에 오르는 승무원들을 보니, 나 역시 몇 달 전 헤벌쭉하고 웃으며 상을 받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상을 받는 직원은 단순히 상이라서 좋은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한 대가를 누군가가 알아준다는 것을 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었다. 마치 내가 받는 것처럼 기뻤고, 큰 박수로 그들에게 축하를 보냈다.
이달의 우수직원 시상이 끝이 나고, 이어서 올해의 우수직원 시상(Employee of the Year)이 이어졌다. 올해의 우수직원은 이달의 우수직원 중 각부서장들의 리뷰와 평가를 통해 호텔부서(Hotel Operation)에서 1명, 항해부서(Marine operation)에서 1명이 선발되는 큰 의미의 상이다.
"그녀의 작은 체구를 보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갖다가도,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체구가 작아서 더 신속하고, 부지런히 움직 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늘 밝은 웃음과 넘치는 에너지로 승객을 대하며, 몇 달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준 그녀에게 올해의 직원상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첫 한국인 수상자 이기도 하죠, 그녀가 누군지 다들 알겠죠? Congrats, Nayoung! "
내가 올해의 직원상을 받게 된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고, 믿기지도 않았다.
매니저가 말한 서프라이즈, 바로 이것이었다.
후덜 거리는 다리로 무대에 올랐다. 과연 내가 받아도 될 상인지 의심스러웠고, 의아해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캡틴은 "You deserve it. (상 받을 자격 있어)" 란 말로 확인시켰다.
캡틴이 상을 건넸다. 마냥 좋기만 했던 상이 겁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시간들과 더 많은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과 함께 손에 쥐어졌다.
매니저와 캡틴이 내 눈을 바라보며 ,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말은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넌 할 수 있어, 우리가 도와줄게'라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부담감과 걱정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든든하게 지원해주는 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3년, 지금껏 큰 프로젝트가 있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난 혼자 처리하고, 혼자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내 뒤엔 늘 든든한 매니저들이 지켜봐 주고 도와주고 있었고, 동료들이 응원해주고 있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난 정말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고,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내가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 그리고 기회를 준 크루즈라는 곳이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더 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