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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영씨 Mar 07. 2019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하루

하지만 기록하고 싶은 하루

오늘 모 매니저에게 욕을 먹었다.


마닐라 출장 가기 전 처리할 것도 많아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모 매니저가 갑자기 번개처럼 내 책상 앞으로 나타나더니 몇십 초간 자기 할 말을 ‘다다다다우당탕탕’ 큰 소리를 치며 내뱉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 모든 동료들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 파악 안 되니, 이게 무슨 일인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답이 나올 구녕 같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모 매니저는 떠났지만, 그 자리엔 “너 뭐 하는 거야? 네가 뭔데, 네가 무슨 권한으로 내 트레블을 컨트롤하고, 막아!”는 말은 어디로 갈지 몰라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 맴도는 문장, 단어 하나하나를 다시 주워 담았다. 그리고 그 주운 말들을 하나하나 다시 배치하고, 이해하며 왜 이 말들이 내 앞에서 서성거려야 했는지 생각해야 했다.


조용했던 사무실에 갑자기 데시벨이 올라갔다 급하락한 냉랭한 분위기.

하지만 그 반대로 점점 뜨거워지는 내 몸. 손. 얼굴.

막 끓인 국을 냉장고에 넣어둔 것처럼, 냉기와 열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걸 이렇게 직접 체험하다니 이 사회에서 끝도 없이 경험하니 신기할 노릇이다.



문제의 원인은 모 매니저와 같이 왔던 그녀, 나의 동료. A양이 자초한 문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A양이 내 이름을 언급하며 모 매니저는 내가 주동자가 되어 태클을 걸고 이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으로 이해한 탓에 내가 욕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상황.

A양은 어쩔 줄 몰라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있었던 것 같다. 너무 놀라 그녀 얼굴을 볼 상황도 아니었고, 사실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몇 년만 어렸다면 화가 나서 A양, 모 매니저에게 달려가서 대꾸를 했거나 아님 그 자리에서 눈물을 글썽거리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오래 할수록 이력서에 내용만 더 차는 게 아니라 아마 인내심도, 적응 레벨도 차오르나 보다.


  




모 매니저가 남긴 말들을 주워 담아 점점 오르는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그 매니저를 찾아갔다. 난 먼저 사과했다. 물론 내가 잘못도 없는데 무슨 사과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상대방의 화가 더 있는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화를 식혀야 하는 게 먼저고, 그래야만 서로 이성적인 대화가 오고 갈 수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사과가 소화기 역할을 해야 했다.


‘어떤 이유가 있었던 당신을 화나게 했다는 건 내 방식의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 부분에서 대해선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서로가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A양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대로 설명을 하다 보면 A양의 문제점까지 같이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모 매니저 오피스 문 앞에 서있었던 그녀. 못 본 채 가서 문을 닫고 매니저랑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풀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난 못된 역할은 못한다. 특히 건드리면 당장 울 것 같았던 그녀를 보고는 더 그렇게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의 매니저가 품고 있던 화를 견디기 힘들 거라는 걸 읽었다.



목 끝까지 올라오는 그녀의 문제점을 안으로 밀어 넣고는 모 매니저에게 문제의 발생 이유를 설명했다. 나와 그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긴 것이며, 또한 이는 제삼자(업체)의 잘못이 크다며 그 업체에게 잘못을 돌려버렸다. (업체의 잘못도 조금은 있었기에) 어쨌든 모 매니저와 긴 대화 끝에 서로 업체 흉을 보며 미소를 띠며 마무리했다. (화기애애 미소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서로 입꼬리는 올렸다.) 그리고 나는 내 자리에 돌아왔고, 아무 일 없는 듯 일했지만 동료들은 아직도 갑뿐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가왔고, 배고픔의 부름에 하나 둘 의자에서 일어나, '뭐 먹을까'가 낭송되자 냉랭한 분위기도 풀렸다.




두 시간쯤 지나 내 머릿속에 그 상황이 정확하게 정리되고 아무 감정 없이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나의 매니저를 찾아가 잠시 5분만 시간을 내줄 수 있는지 면담 신청을 했다. 어찌 되었건 이 일은 나의 매니저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두 시간 전 상황을 건조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매니저는 가만히 듣더니, 말해주어 고맙고, 잘 처리했다며, 그 모 매니저와는 자신이 따로 이야기를 할 것이니 넌 걱정 말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방식을 바꾸지 말고, 이어가라고 격려해주었다.

어질러진 방을 정리한 기분. 깔끔한 면담이었다.




그 후 난 출장 차 공항으로 가야 했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A양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내가 그 자리에서 모 매니저에게 비평을 받으며 머릿속으로 수 십 번도 너를 언급할까 말까 고민했었다. 그런데 겁에 잔뜩 질린 네 얼굴을 보고 차마 너의 문제점을 내 입으로 꺼낼 수 없었고, 그냥 내가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네가 나서서 사실 제 잘못이에요 라고 해주길 바랬다. 나도 사람인지라 오해받는 것도, 욕 듣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너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이왕 지나간 일이고 나의 매니저가 그리고 상황을 아는 다른 동료들이 위로해주고 알아주기에 그냥 나 혼자 삭히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너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못하겠더라. 그리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적어도 너한테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겨도 내가 다 뒤집어쓰지는 않을 테니 알아서 잘 처리해라는 말을 해야 나에게도 일이 줄어들어 같아 말하는 거다.” 라며 그녀에게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지고 나열했다.


그리고 나는 기내에서 맥주 두 캔의 도움으로 다른 좋았던 오늘 오전의 시간까지 통틀어 버리고 잊었다.





필리핀에 도착해서 휴대폰을 켰는데, 그녀가 보낸 메시지가 와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의도가 있어서 너한테 그런 건 절대 아냐. 겁도 났고, 너랑 매니저가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내가 혹시나 끼어들어 말을 잘못하지 않을까 또 그러다 원치 않게 일이 더 커질까 그래서 말을 못 했어. 그리고 아까 매니저한테 내가 잘못했다고 내 실수였다고 이야기했어. 매니저도 이해해줬고, 앞으로 이런 일 다시는 안 생기게 하겠다고 말도 했어. 미안해”


 
 난 알았다며 다음 주 상해로 돌아가면 같이 점심 한 번 먹자고 답장을 했다.



호텔로 돌아와 메일을 열어보니 모 매니저가 보낸 메일이 한 통 보였다. 이미 하루의 기억을 맥주 두 캔에 통째로 날려 버렸는데, 리콜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읽을지 말지 잠시 망설이다 열어보았다.  


"A가 방금 와서 상황설명을 했다. 그런 상황인 줄 모르고 무작정 너한테 가서 화내서 미안하다. 그리고 너 마닐라에서 돌아오면 같이 밥 한 끼 하자."



내가 A양에게 제안한 식사가 모 매니저를 통해 돌아오고, 결국 서로에게 밥 한 끼 하자로 결론이 난 하루.


 
 참 이럴 때 ‘수고했어 오늘도’가 가슴속 깊이 들어온다.


 내가 남들 대신해 오해를 받고 화를 당하는 경험할 때가 있다.  과거에는 그런 경험을 했을 때 그대로 상대방에게 돌진해서 들이박은 적도 있었고, 그냥 넘어가자고 술 한잔에 잊을 때도 있었고, 다른 동료들과 험담을 무진장 해대며 속을 푸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도 훗날 시간이 지났을 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상대방에게 들이박았을 때는 일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결국엔 감정싸움이 돼서 돌아왔다.

그냥 넘어가려고 술 한잔에 잊을 때에는 술 마실 때만 잠시였지, 시간이 지나서 다시 그 기억이 떠올라 분노해했다.

다른 동료들과 험담으로 풀었을 때는 그 뒷담화가 앞담화가 되어 또 다른 싸움을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런 과거와는 조금 다른 방법,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대면하고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물론 상대에 따라 이 방법도 달라지겠지만, 상대방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것이 보인다면 가끔은 잘못했던 상대지만, 살짝은 그 잘못을 감싸 안아주어도 괜찮다 생각한다. 그러면 그 상대방은 언젠가 나에게 큰 감사로 보답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닐 것이다. 상황이 정리된 것이지, 내 마음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내 마음이 치유가 되었는지 안되었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자신만의 마음 치유 방법은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면 좋을 듯하다. 나에게 치유는 명상도 있고, 요가도 있고, 술도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건 아마 글쓰기인 듯하다.  나의 수첩에, 블로그에, 그리고 이 곳에 문자 그대로, 어떤 감정의 옷을 입히지 않고 벌거숭이 상태로 기억이 아닌 기록을 해두는 것. 그것이 바로 치유의 방법이다.

 

당신의 마음 치유 방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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