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영씨 Mar 07. 2019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하루

하지만 기록하고 싶은 하루

오늘 모 매니저에게 욕을 먹었다.


마닐라 출장 가기 전 처리할 것도 많아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모 매니저가 갑자기 번개처럼 내 책상 앞으로 나타나더니 몇십 초간 자기 할 말을 ‘다다다다우당탕탕’ 큰 소리를 치며 내뱉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 모든 동료들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 파악 안 되니, 이게 무슨 일인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답이 나올 구녕 같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모 매니저는 떠났지만, 그 자리엔 “너 뭐 하는 거야? 네가 뭔데, 네가 무슨 권한으로 내 트레블을 컨트롤하고, 막아!”는 말은 어디로 갈지 몰라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 맴도는 문장, 단어 하나하나를 다시 주워 담았다. 그리고 그 주운 말들을 하나하나 다시 배치하고, 이해하며 왜 이 말들이 내 앞에서 서성거려야 했는지 생각해야 했다.


조용했던 사무실에 갑자기 데시벨이 올라갔다 급하락한 냉랭한 분위기.

하지만 그 반대로 점점 뜨거워지는 내 몸. 손. 얼굴.

막 끓인 국을 냉장고에 넣어둔 것처럼, 냉기와 열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걸 이렇게 직접 체험하다니 이 사회에서 끝도 없이 경험하니 신기할 노릇이다.



문제의 원인은 모 매니저와 같이 왔던 그녀, 나의 동료. A양이 자초한 문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A양이 내 이름을 언급하며 모 매니저는 내가 주동자가 되어 태클을 걸고 이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으로 이해한 탓에 내가 욕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상황.

A양은 어쩔 줄 몰라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있었던 것 같다. 너무 놀라 그녀 얼굴을 볼 상황도 아니었고, 사실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몇 년만 어렸다면 화가 나서 A양, 모 매니저에게 달려가서 대꾸를 했거나 아님 그 자리에서 눈물을 글썽거리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오래 할수록 이력서에 내용만 더 차는 게 아니라 아마 인내심도, 적응 레벨도 차오르나 보다.


  




모 매니저가 남긴 말들을 주워 담아 점점 오르는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그 매니저를 찾아갔다. 난 먼저 사과했다. 물론 내가 잘못도 없는데 무슨 사과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상대방의 화가 더 있는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화를 식혀야 하는 게 먼저고, 그래야만 서로 이성적인 대화가 오고 갈 수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사과가 소화기 역할을 해야 했다.


‘어떤 이유가 있었던 당신을 화나게 했다는 건 내 방식의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 부분에서 대해선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서로가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A양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대로 설명을 하다 보면 A양의 문제점까지 같이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모 매니저 오피스 문 앞에 서있었던 그녀. 못 본 채 가서 문을 닫고 매니저랑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풀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난 못된 역할은 못한다. 특히 건드리면 당장 울 것 같았던 그녀를 보고는 더 그렇게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의 매니저가 품고 있던 화를 견디기 힘들 거라는 걸 읽었다.



목 끝까지 올라오는 그녀의 문제점을 안으로 밀어 넣고는 모 매니저에게 문제의 발생 이유를 설명했다. 나와 그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긴 것이며, 또한 이는 제삼자(업체)의 잘못이 크다며 그 업체에게 잘못을 돌려버렸다. (업체의 잘못도 조금은 있었기에) 어쨌든 모 매니저와 긴 대화 끝에 서로 업체 흉을 보며 미소를 띠며 마무리했다. (화기애애 미소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서로 입꼬리는 올렸다.) 그리고 나는 내 자리에 돌아왔고, 아무 일 없는 듯 일했지만 동료들은 아직도 갑뿐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가왔고, 배고픔의 부름에 하나 둘 의자에서 일어나, '뭐 먹을까'가 낭송되자 냉랭한 분위기도 풀렸다.




두 시간쯤 지나 내 머릿속에 그 상황이 정확하게 정리되고 아무 감정 없이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나의 매니저를 찾아가 잠시 5분만 시간을 내줄 수 있는지 면담 신청을 했다. 어찌 되었건 이 일은 나의 매니저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두 시간 전 상황을 건조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매니저는 가만히 듣더니, 말해주어 고맙고, 잘 처리했다며, 그 모 매니저와는 자신이 따로 이야기를 할 것이니 넌 걱정 말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방식을 바꾸지 말고, 이어가라고 격려해주었다.

어질러진 방을 정리한 기분. 깔끔한 면담이었다.




그 후 난 출장 차 공항으로 가야 했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A양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내가 그 자리에서 모 매니저에게 비평을 받으며 머릿속으로 수 십 번도 너를 언급할까 말까 고민했었다. 그런데 겁에 잔뜩 질린 네 얼굴을 보고 차마 너의 문제점을 내 입으로 꺼낼 수 없었고, 그냥 내가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네가 나서서 사실 제 잘못이에요 라고 해주길 바랬다. 나도 사람인지라 오해받는 것도, 욕 듣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너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이왕 지나간 일이고 나의 매니저가 그리고 상황을 아는 다른 동료들이 위로해주고 알아주기에 그냥 나 혼자 삭히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너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못하겠더라. 그리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적어도 너한테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겨도 내가 다 뒤집어쓰지는 않을 테니 알아서 잘 처리해라는 말을 해야 나에게도 일이 줄어들어 같아 말하는 거다.” 라며 그녀에게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지고 나열했다.


그리고 나는 기내에서 맥주 두 캔의 도움으로 다른 좋았던 오늘 오전의 시간까지 통틀어 버리고 잊었다.





필리핀에 도착해서 휴대폰을 켰는데, 그녀가 보낸 메시지가 와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의도가 있어서 너한테 그런 건 절대 아냐. 겁도 났고, 너랑 매니저가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내가 혹시나 끼어들어 말을 잘못하지 않을까 또 그러다 원치 않게 일이 더 커질까 그래서 말을 못 했어. 그리고 아까 매니저한테 내가 잘못했다고 내 실수였다고 이야기했어. 매니저도 이해해줬고, 앞으로 이런 일 다시는 안 생기게 하겠다고 말도 했어. 미안해”


 
 난 알았다며 다음 주 상해로 돌아가면 같이 점심 한 번 먹자고 답장을 했다.



호텔로 돌아와 메일을 열어보니 모 매니저가 보낸 메일이 한 통 보였다. 이미 하루의 기억을 맥주 두 캔에 통째로 날려 버렸는데, 리콜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읽을지 말지 잠시 망설이다 열어보았다.  


"A가 방금 와서 상황설명을 했다. 그런 상황인 줄 모르고 무작정 너한테 가서 화내서 미안하다. 그리고 너 마닐라에서 돌아오면 같이 밥 한 끼 하자."



내가 A양에게 제안한 식사가 모 매니저를 통해 돌아오고, 결국 서로에게 밥 한 끼 하자로 결론이 난 하루.


 
 참 이럴 때 ‘수고했어 오늘도’가 가슴속 깊이 들어온다.


 내가 남들 대신해 오해를 받고 화를 당하는 경험할 때가 있다.  과거에는 그런 경험을 했을 때 그대로 상대방에게 돌진해서 들이박은 적도 있었고, 그냥 넘어가자고 술 한잔에 잊을 때도 있었고, 다른 동료들과 험담을 무진장 해대며 속을 푸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도 훗날 시간이 지났을 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상대방에게 들이박았을 때는 일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결국엔 감정싸움이 돼서 돌아왔다.

그냥 넘어가려고 술 한잔에 잊을 때에는 술 마실 때만 잠시였지, 시간이 지나서 다시 그 기억이 떠올라 분노해했다.

다른 동료들과 험담으로 풀었을 때는 그 뒷담화가 앞담화가 되어 또 다른 싸움을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런 과거와는 조금 다른 방법,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대면하고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물론 상대에 따라 이 방법도 달라지겠지만, 상대방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것이 보인다면 가끔은 잘못했던 상대지만, 살짝은 그 잘못을 감싸 안아주어도 괜찮다 생각한다. 그러면 그 상대방은 언젠가 나에게 큰 감사로 보답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닐 것이다. 상황이 정리된 것이지, 내 마음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내 마음이 치유가 되었는지 안되었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자신만의 마음 치유 방법은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면 좋을 듯하다. 나에게 치유는 명상도 있고, 요가도 있고, 술도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건 아마 글쓰기인 듯하다.  나의 수첩에, 블로그에, 그리고 이 곳에 문자 그대로, 어떤 감정의 옷을 입히지 않고 벌거숭이 상태로 기억이 아닌 기록을 해두는 것. 그것이 바로 치유의 방법이다.

 

당신의 마음 치유 방법은 무엇인가요?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가 가져다준 봄의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