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의 공포와 혐오
인터넷은 정치를 매개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어리석어 보인다. 인터넷이란 전 세계를 연결하는 통신망들의 집합체를 말하며, 정치는 인간들이 서로 통신(communication)하며 공적인 것(the common)⑴을 구성·변형·실행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두 정의(定義)를 종합하면 인터넷은 정치를 매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분명하게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공적인 것은 어느 일방에게 귀속되지 않고 복수의 시민들 ‘사이에서(inter)’ 구성된다는 점에서 인터넷과 정치는 꽤나 그럴싸한 조합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선 질문은 그 현실화 측면에서, 즉 “그렇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라고 되묻는 과정에서 우리를 우회할 수 없는 정치적 난점들로 이끈다. 오늘날 인터넷의 발전으로 대중들이 어느 때보다 넓은 범위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중들 사이에서 점점 강화되고 있는 혐오를 목도할 수 있다. 각종 포털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메갈리아’의 이용자들을 ‘메퇘지’라는 멸칭으로 부르며 집단적으로 조롱하거나 그들의 신상정보를 무단으로 공개하고 있는 최근의 상황이 대표적인 사례다. 혐오는 정치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데, 혐오가 격화될수록 대중들은 서로를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불가해한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대상으로서 공적인 것이 부인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혐오는 일방이 다른 일방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공론장으로부터 축출하려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로 마무리된다.
논리적 가정과는 상이한 현실 앞에서 질문은 인터넷이 매개하는 정치(이하 ‘인터넷 정치’)가 왜 불가능한 것이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모습을 바꾼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불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난점들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인터넷 정치의 불가능성은 인터넷 외부의 이러저러한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기인하는 효과에 불과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지나치게 현실을 단순화한다. 인터넷은 그 외부를 반영하는 허구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지적하였듯이 정치적 실천을 규정하는 것은 “정세 및 정념적 경제나 체제에 따라 달라지는 대중들(masses)의 실존양상들”⑵이다. 인터넷은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가 분석했던 공중(public)으로서의 삶⑶을 형성·확장할 뿐만 아니라 정념이 충돌하고 교환되는 특수한 구조를 형성함으로써 오늘날 대중들이 스스로의 삶을 상상적으로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인터넷은 대중들의 삶이 조직되는 엄연한 하나의 현실이며 단순히 외부의 반영으로만 간주할 수 없는 독자적 특징을 갖는다. 물론 대중들에게 작용하는 삶의 다양한 조건들과 그들이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는 내용들 중 다수가 인터넷 외부로부터 비롯한다는 점에서 인터넷 정치에 미치는 외부의 영향력도 동시에 고려되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질문은 이중으로 제기된다. 인터넷 자체가 갖는 구조의 속성들과 인터넷 공중이 그에 조응하며 보여주는 행동 양상에 의해서 드러나는 인터넷 정치의 난점은 무엇인가? 또한 동시에 인터넷 정치를 포함한 정치 전반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인터넷 외부의 조건들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이중의 질문에 대하여 답하는 것이 곧 본고의 목적이다.
1. 인터넷과 고독한 대중들
인터넷은 대중들을 공중으로 만든다. 타르드는 공중을 “정신적인 집합체”⑷로서 규정한다. 즉,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원거리에서 서로 의견과 정보를 주고받음으로써 관념이나 의지를 동시적으로 공유하는 집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중은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 모여 있는’ 집합체이며 물리적 속성에 지배되는 군중(foules)과 달리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을 통해서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된 대중들의 현대적인 실존양상을 반영한다.
흥미로운 것은 타르드가 공중을 형성하는 ‘(의견과 감정의) 전염’에 대해 전개하고 있는 분석이다. 그는 인간들이 “시사성이라는 느낌(sensation de l'actualité)”⑸에 민감하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들은 각자 경험세계가 상이하기 마련이므로 무엇을 ‘시사적인 것(혹은 현실적인 것)’⑹으로 생각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각자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서로 물리적으로 가까이에 있지도 않은 공중이 어떻게 서로에게 무엇이 시사적인지에 대해 암시를 주고 공통된 반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타르드는 이에 대한 답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시선의 작용”⑺에 익숙하게 만드는 도시생활을 강조한다. 인구가 밀집된 공간인 도시에서 성장하면서 사람은 처음에 물리적으로 가까운 집단으로부터 받는 시선을 의식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이처럼 가까운 집단의 시선을 의식하는 법에 점점 익숙해지면 이후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들을 시사성에 민감하도록 만드는 조건이며, 나아가 시사성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기반으로 공중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타르드가 지적하고 있는 ‘시사성에 대한 민감함’은 인간의 사회성을 해명하고자 시도하는 하나의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사회성의 토대를 탐구한 또 다른 사상가를 떠올릴 수 있는데, 바로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다. 스피노자의 분석은 타르드의 분석과 연결되며 흥미로운 시사점들을 던진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도시의 토대(사회성)’를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다. 사회성의 한 측면은 이성의 인도에 따라 능동적으로 형성된다. 이성의 인도에 따라 인간들은 서로에게 서로가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든든한 버팀목임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이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선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게 만들며, 공동선은 사람들의 실제적인 일치를 이뤄내어 사회를 구축하는 토대가 된다. 반면, 사회성의 다른 한 측면은 정념의 인도에 따라 수동적으로 형성된다. 정념 안에서 인간들은 사랑하는 것을 동일하게 사랑하는 한에서 서로 일치하며 사회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사랑의 정념이란 외부에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며, 또한 그 대상과 방법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타인이 나와 동일할 것이라는 상상⑻이 깨어질 경우)에 언제든 증오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사회성은 정확히 앞서 분석한 두 가지 측면, 즉 이성과 정념의 통일로서 제시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타르드가 지적하는 공중의 조건으로서의 ‘시사성에 대한 민감함’이 정확히 스피노자가 지적하는 정념(으로서의 사회성)이 갖는 특징인 ‘차이들에 대한 공포’와 조응한다는 점이다. 공중을 구성하는 인간들이 타자의 시선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따라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사실은, 곧 공중 안에서 (타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같은 대상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게 만들고자 하는) 야심이나 (자신이 혹여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을 경우 받게 될 증오에 대한) 공포가 나타날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공중에 속한 개개인은 자신에 의해 상상된 대중들에 대한 야심과 공포 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킬 위험에 노출된다. 특히 막대한 양의 정보와 휘발적인 텍스트들 속에서 대중들을 파편적으로만 상상할 수 있는 인터넷 공중 속 개개인은 자신의 상상하고만 대면할 뿐 실재하는 대중들을 엄밀하게 인식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욱 이러한 고립에 빠지기 쉽다. 그리하여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 모여 있는’ 공중은 인터넷과 만나 ‘함께 모여 있으면서도 떨어져 있는’ 고독한 대중들(multitude in solitude)⑼으로 변모한다.
예컨대 미국의 공영방송 NPR의 실험⑽은 고독한 대중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NPR의 웹사이트 담당자는 평소에 웹사이트 구독자들이 얼마나 주의 깊게 기사를 읽고 있는지 궁금했다. 본인이 보기엔 기사의 내용과 별로 상관없는 주제로 페이스북상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2014년 만우절에 별다른 정보가 없는 가짜 기사를 게시하고 ‘이 기사를 읽고 있으면 댓글을 달지 말아 달라’는 내용을 넣었다. 그러나 해당 구절을 삽입한 기사도 여느 기사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기사의 제목만으로도 페이스북 공유를 통해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NPR의 사례는 일차적으로는 대중들의 난독(혹은 저널리즘의 위기)으로 독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난독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함으로써 우리는 조금 더 생각할 지점을 얻게 된다. NPR의 사례는 어쩌면 인터넷 공중 속 개인들이 인터넷 기사를 통해 정보를 얻고자 하기보다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시사성’ 내지 ‘자신이 상상한 대중들’이 실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데 목말라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인터넷 기사 댓글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실재에 가닿을 수 없는 상상 속의 대중들로 인해 동요하는 고독한 대중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분석은 여전히 답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질문은 계속해서 뒤따른다. 인터넷은 어떻게 고독한 대중들의 탄생에 기여하는가? 고독한 대중들은 어떻게 정치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마는가? 이제 이 질문들에 답해보자.
2. 야심과 희열로서의 고독
각각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기질(ingenium)에 맞추어 주기를 원한다. 즉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찬성하는 것에 찬성하고 자기가 반대하는 것에 반대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너도나도 최고가 되고자 열망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며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데 서로가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승리를 한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끼친 손해를 자신에게 행한 선보다 더욱 자랑스러워한다.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정치론』 1장 5절
인터넷 공중 속 고독한 개인들은 상상된 대중들로 인해 야심과 공포 속에서 동요한다는 것을 앞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야심(ambitio)이란 무엇인가? 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사회 분석에서, 특히 정념에 대한 분석에서 아주 독특하게 활용하고 있는 개념이다. 야심은 본래 “다른 사람의 기쁨이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⑾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대중들과 일치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잘 보임으로써 대중들에게 기쁨을 주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런데 이 야심은 점점 확대됨에 따라서 대중들에 대한 ‘본인의’ 일치만이 아니라 ‘타인의’ 일치까지도 요구하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결국 자신이 상상한 대중들에게 잘 보이고자 했던 욕망이 거꾸로 그 상상으로부터 일탈하는 타자들을 규제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전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극우적인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의 이용자들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점⑿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2014년 12월 일베 이용자에 의한 토크콘서트 폭탄테러 사건 이후, 범인이 사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는 점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그 충격을 수습하는 가운데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을 언급하며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언제든지 분출될 수 있는 우리의 폭력성을 성찰적으로 비판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물론 이러한 성찰성은 일베 자체를 신비화하지 않기 위해 분명 필요한 것이었지만 문제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지는 못했다. 만약 야심이라는 관점을 통해 이 문제를 되돌아본다면 일베를 이용하는 계층이 ‘평범한’ 이유는 실제로 그들이 ‘스스로 상상한 대중’의 기준에 입각해 ‘평범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수적인 언론과 학교 교육 등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통해 상상된 대중들(불순한 공산세력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선량한 애국시민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베 이용자들은 애초에 ‘애국시민들과 일치하기 위해(애국시민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평범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야심이 일베라는 공간에서의 자기폐쇄적 되먹임을 통해 극대화되었을 때, 그들은 기존의 질서에 변화를 요구하고 애국시민들과의 일치를 거부하는 일탈자들을 향해 날선 폭력들을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문제는 악이 평범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에 일치되려는 강렬한 욕망이 공동선을 좌절시키는 악으로 전도될 수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의 구조적 특성이 야심을 더 일반적이고 강력한 욕망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우선 인터넷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매개함으로써 자신의 상상에 대한 개인적 신뢰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요컨대 인터넷은 이용자로 하여금 ‘전체 대중들이 본인이 선호하는 것과 유사한 대상을 유사한 방식으로 선호한다’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터넷의 기능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데, 웹 데이터 분석 사이트 파슬리(Parse.ly)의 2015년 발표에 따르면 이미 뉴스에 접근하는 경로에서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하 ‘SNS’)는 구글로 대표되는 검색 엔진의 비중을 따돌렸다고 한다.⒀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사적인 것’에 접근하기 위한 경로로 SNS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SNS(특히, 페이스북)는 자체적인 알고리즘을 통해서 사용자의 관심사와 선호를 분석하고 최적화된 인적 관계망을 구성하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즉, SNS를 통해 인터넷 이용자들은 입맛에 맞게 편집된 색안경을 끼고 대중들을 상상하도록 유도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터넷은 차단과 축출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야심을 충족시킬 때 얻는 희열을 배가시킨다. 인터넷의 외부에서 대중들은 상호의존적인 사회적 조건 속에서 서로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인터넷은 사정이 다르다. 이질적이고 일탈적인 적대 집단이나 개인을 같은 커뮤니티 이용자들이나 SNS 친구들과 함께 비난하고 조롱할 때, 개인들은 자신이 ‘교양인’이자 ‘상식인’이라는 점에서 안도감과 쾌감을 느끼게 된다.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설령 저항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여의치 않으면 그들을 차단하거나 집단적으로 비추천을 주어 퇴장시켜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상상된 대중들과 그 속에서 합일을 이룬 자신이라는 유아론(唯我論)적 지향이 인터넷의 구조적 특징⒁과 만나 야심을 부추기는 것이다.
결국 인터넷은 스스로가 평범하고 선량하다고 여기는 개인일수록 희열을 누리는 형태⒂로 고독 속에 침잠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렇게 고립된 이들이 실재하는 권력관계와 장치들에 의해서 지배적인 입장에 봉사하도록,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혐오를 매개하도록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상상적 합일의 희열에 고취된 폭력은 ‘국가’ 내지 ‘법’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신 앞에 일탈자들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적 의례로, 혹은 불경한 이들에 대한 정당한 혐오로 이뤄지는 성전(聖戰)으로 변모하며 정치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놓고 만다.
3. 공포와 비애로서의 고독
그리하여 자연상태로 되돌아간 그들은 모세의 조언을 굳게 신뢰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어떤 유한자에게도 양도하지 않고 오직 신에게만 양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일치된 한 목소리로 신의 모든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이며, 예언자의 계시를 통해 신이 설립한 것 이외의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17장 7절
고독한 대중들의 한편에 야심이 가져다주는 희열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공포가 가져오는 비애(悲哀)가 존재한다. 그것은 위에서의 사례와 반대로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고 여기는 개인일수록, 상상 속의 대중들로부터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이일수록 떨게 만드는 공포다. 예컨대 이는 모든 것을 지켜보는 신 앞에서 불경죄를 저지른 죄인이 신이 내릴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떨면서 살 때 느끼는 감정과 같다. 특히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에 맞서서 스스로를 옹호해야 하는 소수자들, 대안적인 정치세력들은 이러한 두려움과 슬픔에 노출되기 쉽다.
그런데 이러한 공포와 비애의 감정이 인터넷을 통해 강화된다고 다시금 증명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앞서 야심에 의한 희열이 인터넷 구조적 특징들에 의해 강화된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거쳤던 논변을 거울에 비추듯 뒤바꾸어 증명할 수 있다. 예컨대 스스로가 상상하는 대중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는 이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자신의 상상을 강화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소수에 해당하는지, 세상에는 아직도 얼마나 많은 야만과 폭력이 산재해있는지를 항상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인터넷이 야심에 불타오르는 이들에게 과잉된 희열을 주는 것과 똑같은 원리로 인터넷은 공포에 질린 이들에게 과잉된 비애를 준다.
그런 의미에서 차단이나 비추천도 공포에 질린 이들에게는 결코 위안이 되지 못한다. 차단 목록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자신이 비추천을 누르는 게시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개인의 감정은 우울감과 고독감에 지배될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세상과 ‘맞지 않는 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가 전체 대중들의 편에 선다는 상상을 굳게 믿었던 이들이 느끼는 감정의 정반대의 것이다.
상상된 대중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존적 공포에 떨어야만 하는 이러한 상황은 그 자체로 문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공포가 대안적인 정치세력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편에서 인터넷이 과장하여 보여주는 야만적 폭력 앞에서 그에 대응하려는 노력들(즉, 대안적인 정치)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지며 대안적 정치세력의 도덕적 정당화를 끊임없이 방해한다. 공포에 의해서 운동에 대한 신뢰가 퇴색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내부조직으로의 후퇴는 오히려 다른 비애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대중들과의 차이로부터 오는 비애를 막기 위해 ‘이념 아래 동질하다고 상상된’ 사람들에 한해 폐쇄적인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경우이다. 이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형성되는 경우보다는 처음에는 대안적인 정치를 위한 열정으로 시작했던 공동체가 운동의 쇠퇴와 함께 고착화되며 폐쇄적으로 변모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그러나 이념과 운동 앞에서 평등하다고 맹세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외부로부터의 비판과 외부로의 확장에 무뎌지면서 이윽고 이념과 운동을 가장 ‘잘 해석하리라 믿는’ 예언자 내지 도그마를 등장시키게 되며, 결국 하나의 해석 앞에 스스로를 다시 자기검열과 차이들에 대한 공포로 몰아넣는다. 결국 또 다른 신학적 비애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를 불가능으로 몰아넣는 공포의 정념은 불평등에 기반을 둔 주류적인 질서를 고착화하고 변화를 논하려는 일체의 정치적 행위를 불가능한 것으로 묶어놓으려는 기득권의 부정의(不正義)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정치의 난점들은 마치 오목렌즈로 대상을 바라보듯이 과장하는 인터넷과 만나 강화된다. 여기서 인터넷이 정치를 매개하는 데에 있어서 발생하는 어려움은 그것이 합리적인 인식과 토론을 다소간 왜곡하는 장치(apparatus)⒃를 매개·확장한다는 점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 대중들의 야심와 공포를 넘어
나는, 인간의 행동들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공격하지 않고, 그것들을 인식하고자 신중을 더 했다.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정치론』 1장 4절
그렇다면 정치를 불가능한 것으로 유도하는 이러한 인터넷의 구조들에 맞서 어떻게 정치를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거시적인 차원에서 답의 방향성은 너무나도 명료하다. 대중들을 양가적인 감정 속에서 동요하게 만드는 정념의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 이성의 능동성에 도달해야 한다. 즉, 세상을 합리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발리바르는 “가능한 최대 다수가 가능한 최대한을 인식하기”⒄라는 명제로 이를 표현한 바 있으며, 결국에는 인식이 하나의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해낸다. 그러나 대안은 여전히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상태에 놓여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답들이 필요하다.
먼저, 야심과 공포의 풍랑 사이에서 동요하지 않도록 마음의 닻을 내릴 수 있는 윤리가 필요하다. 인터넷의 공중은 자신의 경험적 한계 속에서 대중들을 상상하고, 상상된 대중들과의 관계 속으로 일치로 나아가며 그로부터 일탈자들을 배격함으로써 야심의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반대로 이에 실패할 경우에 극도의 공포와 비애 속에서 비참함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하면 야심이 가져다주는 강렬한 쾌감으로부터 벗어나 대중들이 서로를 직시할 수 있을까? 이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표현을 빌리자면 ‘환대(hospitalité)’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환대란 자신의 상상하는 세계의 통제권을 포기함으로써 타자들을 무조건적으로 맞이하고 그리하여 유아론적인 표백의 결과로 얻었던 자기 공간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인터넷에서 마주치는 개인들의 인격성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환대를 달성하는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즉, 손쉽게 ‘몰지각한’ 대상을 차단하고 조롱할 수 있다는 생각, 인터넷 공동체를 불편한 의견과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인정 욕구가 충족되는 안락한 피난처(도구)로 활용하려는 자세로부터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다. 물론 데리다 역시 이러한 환대의 윤리가 지닌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통제권을 포기하는 무조건적 환대는 항상 호혜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적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자신과 동일한 색으로 표백 가능한 무언가가 아님을 깨닫는 것, 균열된 세계의 한 틈바구니에는 언제나 긴장과 갈등과 의지와 사랑을 동반하는 타자의 자리가 있어야 함을 깨닫는 것이 환대의 윤리가 갖는 진정한 의의이다.
무엇이든 ‘과잉된 것’으로 보여주는 인터넷의 창을 과신하지 않는 자세도 하나의 대안이 된다. 언제나 사회가 보이는 그대로의 것 이상을 담고 있다면, 인터넷은 거꾸로 보이는 그대로의 것 이하(Less than meets the eye)를 담고 있다. 예컨대 흔히 사람들이 ‘여론’을 파악하는 기준이 되는 인터넷 기사들의 댓글들은 특정 집단과 특정 계층의 입장을 과대대표하고 있다. 인터넷 기사의 댓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사회의 의식세계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한계를 인정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더 과학적인 방법을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 대안적인 정치를 시행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노력은 더더욱 필수적이다. 인터넷은 그 광대한 접속의 범위로 인해,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장치를 매개한다는 특징으로 인해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호출해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설득하고 바꿔야 할 대상들은 역량의 측면에서나 필요성의 측면에서 일부로 제한되어 있다. 즉, 우리가 설득할 수 있고 설득해야 되는 사람들을 파악하는 방법은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적들과 키보드로 혈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리와 자세를 넘어 인터넷 정치를 구축하려는 실천은 무엇이 있는가? 그 답은 이중적이다. 먼저, 인터넷의 내부에서 우리의 상상을 왜곡된 형태로 고착시키며 팽창시키고 극대화시키는 인터넷의 정동 경제 자체에 대해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앞서 환대의 윤리를 확대하기 위한 정동 경제의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타자와의 긴장을 끌어안는 것은 효용을 최대화하기 위한 원칙들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구조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터넷에서의 ‘소비자 윤리’가 ‘환대의 윤리’를 지배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도구가 아닌 인격으로서 조건 없이 긍정하고 토론을 시작할 수 있겠는가? 또한 동시에 인터넷의 내·외부 모두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대한 해체를 수행해야 한다. 이들 장치는 정치의 장 안에서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신학적 적대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중적인 실천’을 수행하기 위한 전략들은 정세 속에서 구체화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원칙 이상의 것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에 답해보자. 인터넷은 정치를 매개할 수 있는가?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터넷 속의 상상된 대중들과의 대면에서 벗어나 손에 잡히는 근처의 사람들과의 대화를 늘려나가고 고독함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타자에게 닿기 위한 윤리적인 노력과 정치적인 실천이 수행될 때에만 인터넷이 자신을 확대해서 비추는 모나드의 거울이 아니라 진정한 연결의 창(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⑴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논의할 수 있고 논의해야 하는 공통된 삶의 문제. 예컨대 공공선(the common good)을 추구하는 방법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표현을 빌려서 다시 정의하자면 “시민들의 공동체(Polis)가 수행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본고에서 언급되는 ‘공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⑵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2014, p.151
⑶ 가브리엘 타르드, 『여론과 군중』, 이상률 옮김, 2015
⑷ 가브리엘 타르드, 앞의 책, p.15
⑸ 가브리엘 타르드, 앞의 책, p.18
⑹ 프랑스어 actualité(영:actuality)가 의미하는 바를 풀어보면 ‘시사성’만이 아니라 ‘현실성’ 역시 단어의 중요한 뜻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역자의 번역을 따라 ‘시사성’으로 옮긴다.
⑺ 가브리엘 타르드, 앞의 책, p.19
⑻ 한 가지 짚을 점은 ‘상상’은 ‘허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상상’은 인간의 인식이 갖는 한계로 인해 다소 왜곡된 형태로 포착된 현실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정부분 현실의 요소를 담고 있다.
⑼ 여기서는 극적인 대비를 위해 multitude라는 말을 썼으나 본래 multitude와 masses는 모두 multitudo라는 라틴어의 번역이다. 전자는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의 번역어로 우리말로는 ‘다중’으로 옮기며, 후자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번역어로 우리말로는 ‘대중들’로 옮긴다.
⑽ 2014년 4월 1일자 NPR 기사 「Why Doesn't America Read Anymore?」 및 2015년 8월 26일자 미디어오늘 칼럼 「보나마나 이 기사도 아무도 안 읽을 거야」 참조
⑾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p.309 (단, 이 부분은 옮긴이의 용어해설에 해당한다)
⑿ 2013년 5월 30일자 민중의 소리 기사 「일베충도 넷우익도 우리 옆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외 다수의 기사 참조
⒀ 2015년 8월 26일자 ZDNet Korea 기사 「뉴스의 오래된 미래…검색 시대에서 소통시대로」
⒁ 접속만큼이나 차단도 용이하다는 특징, 감당할 수 없는 정보의 양으로 인해 자신의 선호에 따라 편집된 정보에 노출되기 쉽다는 특징
⒂ 고독을 의미하는 ‘solitude’라는 단어 속에 즐거움을 의미하는 양가적인 뉘앙스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놀랍지 않다. 그 즐거움은 유아적인 세계관이 가져다주는 안락함 내지 보다 더 높은 경지(예컨대 신이나 대중들)와의 상상적 합일에서 오는 희열이다.
⒃ 여기서 ‘장치’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라고 할 때의 그 장치를 말한다.
⒄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p.146
참고문헌
- 가브리엘 타르드, 2015. 『여론과 군중』. 서울: 이책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2008. 『정치론』. 서울: 갈무리
- 에티엔 발리바르, 2014. 『스피노자와 정치』. 서울: 그린비
- 에티엔 발리바르, 2007. 『대중들의 공포』. 서울: 도서출판 B
- 손영창, 2012.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와 타자성」. 『프랑스문화연구』 제24집. 97-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