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어머니와 자주 가던 떡볶이 집이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인천 학익동의 어느 시장에 있는 집이었다는 것. 입구에는 언제나 알루미늄 솥 몇 개가 뽀얀 김을 뿜고 있어서,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보려 하면 잘 보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솥은 총 3개였다. 사람 허리 높이에 있는 3개의 화구가 각각 자기가 맡은 음식을 최선을 다해 만들고 있었다. 만두와 순대는 뚜껑이 닫힌 채 쪄지고 있었고, 뚜껑 열린 솥에서는 떡볶이가 국자를 따라 이리저리 섞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나는 떡볶이에 만두 몇 알이 들어간 메뉴를 주로 먹었다. 정해진 이름이 없어서, 말 그대로 “떡볶이에 만두 섞어서 주세요”라고 말해야 했다. 그럼 국방 무늬 멜라민 그릇에 자박한 국물과 기다란 밀떡, 한입 크기의 만두 몇 알이 함께 담겨 나왔다. 나는 떡보다 그 만두가 떡볶이 국물에 섞인 맛을 더 좋아해서, 밀떡을 먼저 다 먹고 나서 만두와 국물이 내는 맛을 온전히 즐겼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뒤에는 떡볶이 집을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에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맛있는 감자탕 집을 찾았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그 집은 떡볶이 집에 이어 우리가 두 번째로 자주 가는 집이 된다. 감자탕 집은 새로 이사 간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렸다. 그 자리는 감자탕 집 이후 만화방이었다가 공인중개사무소였다가 카페였다가 오늘날에는 토스트 집이 된다. 아무튼 감자탕 집이었던 시절에는 한 할머니가 혼자 가게를 운영하셨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 손에 투박하게 담겨 나오는 감자탕은 깻잎과 들깨 가루 맛이 강했다. 그 맛은 여태 내가 좋아하는 감자탕 맛의 기준이 된다. ‘소’ 자였을까, ‘중’ 자였을까. 어머니랑 가면 꼭 15,000원짜리 하나를 시켜서 고기와 감자를 먼저 골라 먹고, 볶음밥으로 마무리했다. 칠이 다 벗겨진 납작한 냄비에 눌어붙은 볶음밥 맛은 뼈 고기만큼이나 맛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 가장 살이 많이 쪘는데, 감자탕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먹는 것도 먹는 거지만, 장소에 있어서도 잊지 못하는 곳이 있다. 짧고 굵게 머물렀던 서울의 종로 3가다. 귀금속 관련 산업이 집중된 곳으로, 그곳에서 나는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벌써 15년 전이다. 그때 종로 3가는 낡고 좁고, 그래서 더 사람으로 더 미어터지는 곳이었다. 8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신축 건물의 꼭대기가 나의 직장이었다. 회사 이름에 ‘캐드’가 들어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회사를 다닌다고 하면 하나같이 설계하는 일을 하는 줄 알았던 곳. 그럼 그때마다 캐드 기사가 아닌 ‘ 광기사’로 일한다고 말하며 멋쩍게 웃어 보여야 했던 시절. 떡볶이나 감자탕처럼 몇 년씩 함께 한 곳이 아님에도 종로 3가는 그리운 장소로서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귀금속 표면을 연마하여 광을 내는 약품은 환기 시설을 아무리 꼼꼼하게 해도 공기 중에 흩어지기 쉬워서 코에도 잘 들어왔다. 오전에 잠깐만 일해도 콧속에는 까맣게 때가 꼈다. 그래서 생전 걸려 본 적 없는 축농증을 일하는 내내 달고 살아야 했다. 퇴근도 많이 늦어서 회사 일이 끝나면 지하철은 거의 막차 시간이 되었다. 그때 서울역에서 인천을 왕복하는 광역 버스가 없었다면 나는 그곳에서 아예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광역 버스 덕분에 새벽에라도 꼬박꼬박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5~6평 정도 되는 공장에 5명 정도가 상주해 근무를 했다. 왔다 갔다 하는 영업 사원 한 명과 매장 직원 한 명을 포함하면, 그 공간에서만 7명이 부딪히며 일했다. 한쪽에는 청산가리가 있고, (갓 주물 되어 나온 귀금속은 표면을 한 번 벗겨내야 하는데, 뜨거운 물에 청산가리를 소량 섞은 다음 귀금속을 담그면 탄산음료를 급하게 따라 낸 것처럼 거품이 올라온다. 그럼 귀금속 표면은 한 꺼풀 벗겨지게 된다.) 한쪽에는 1,000도가 넘는 불꽃이 타고 있고, 요란한 망치 소리와 기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밥시간이 되면 근처 백반집에서 널찍한 쟁반에 식사를 차려 가져다주었다. 그럼 막내인 내가 플라스틱 간이 테이블을 펴서 식사를 세팅한다. 준비가 다 되면 왕고이자 나의 사수이기도 했던 부장님이 휴대용 버너와 냄비를 가져와서 찌개와 각종 찬을 다 쏟아붓고는 짬뽕 찌개를 끓였다. 개개인의 식성은 안중에도 없는 식사 법이었지만, 나는 막내이기에 겸허히 먹었다.
여기까지 적어 내리니 그곳은 한마디로 좋을 게 하나 없는 장소이자 기억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그곳을 듣기 좋은 ‘추억’으로 말한다. 일명 ‘짬 찌개’는 시간이 갈수록 제법 맛있어지고, 코에 끼는 때는 닦아내면 그만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기술이 붙고, 비싼 물건도 한두 개 가공하기 시작하자 코와 얼굴, 옷이 더러워지는 건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뿌듯함뿐.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일하는 건 알게 모르게 친밀감이 쌓이는 일이었고, 어쩌다가 낮 시간에 심부름차 거래처로 걸어갈 땐 그 혼잡하고 비좁은 공간들이 도리어 편하게 느껴졌다. 마주치는 족족 선배님들이라 생각하고 인사하며 다녔더니, 어느 순간부터 가게 사장님들은 나를 볼 때마다 “성배야 오늘도 수고해라”라고 말하시곤 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그게 그 비좁은 거리를 더 편하게 한 것 같다. 모두가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듯한 느낌. 거기에 이 험하고 어려운 일을 어린 나이에 해내고 있다는 뿌듯함에 스스로 어깨까지 올라갔으니, 그 시절은 내내 나의 자랑이자 기쁨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곳은 역대 내가 가장 사랑한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럼 지금은? 이다음은 무엇이 있을까. 모르겠다.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음식도 장소도 추억으로 이름 지어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죄다 옛것들이다. 성인이 된 뒤로 이 나이가 되기까지 내내 그립게 떠올리고 싶은 게 없다. 그립고 다시 마주하고 싶은 것들은 어린 시절에서 멈췄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마 성인이 된 뒤는 그저 비슷한 삶을 무한히 반복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고, 무미건조한 것들만 반복되고 있다. 슬픔, 기쁨, 아픔 등 그 무엇도 이제는 인상적일 정도로 강하게 느낄 수 없는 구조에 놓인 것. 어른이 된 뒤 나는 고양감을 잃어버렸다.
언젠가 한 어르신에게 이런 사연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 속 편한 소리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사랑한 그분은 다정하게 들어주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은 예상치 못한 이상한 말씀만 하셨다. 젊어서 좋다고. 그 시절이 부럽다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는 그 시절, 나는 그때 어떤 걸 좋아했고, 무엇 때문에 행복했다고. 나를 앞에 두고 잠시 아주 멀리 있는 걸 들여다본 사람처럼 이야기하셨다. 젊음을 아직 떠나보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나의 지금을 그리워한다니. 나는 그저 멋쩍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때 내 발에는 "사람은 지금 지나고 있는 시간은 알려고 하지 않고, 지나간 시간만 사랑한다"는 문장이 밟혀 있었다.
과일 장사꾼을 위한 이야기 <내가 팔았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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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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