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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세연 Jul 29. 2021

인생에 한 번쯤 분홍 머리

[휴직 일기] 당신에게는 버킷(머리)리스트가 있나요?

한 달의 휴가를 앞두고(직장인이 어떻게 한 달이나 휴가를 썼는지 궁금하시다면 그 전 글을 읽어주세요) 내 온 신경은 '어떻게 하면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였다. 내게 찾아온 소중한 시간의 단 1초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게 어떤 휴가인데. 내가 5년을 일하고 받은 휴가인데! ‘제주 한 달 살기’라는 큰 계획은 정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요새 ‘한 달 살기’는 너무 흔해진 느낌인 거다. 나는 이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나를 좀 더 신나게 할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그리고 문득 머리카락에 시선이 멈췄다. 찰랑찰랑한 긴 머리, 샛노란 탈색 머리, 푸들같이 뽀글한 파마,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듯 싹둑 자른 단발머리까지. 변화를 좋아하는 성격 덕에 망설임 없이 원하는 머리스타일을 해봤다. 하지만 입사 이후 회사원의 자아가 더 이상의 모험을 허락하지 않았다. 언급했듯 보수적 이미지의 업계인 회사에서 노란 머리 회사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스스로 감당이 안되었던 거다. 그러나 한 달간 나는 회사를 떠날 테고, 무난한 사회생활러의 자아에 꽁꽁 숨겨왔던 프로변신러의 욕망은 다시 눈을 떴다.


나는 정말 이때 아니면 안 되는 머리를 하고 싶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 머리. 5년간 지켜온 ‘무난함’이라는 가치의 대척점. 나름의 비장함을 가지고 결국 정한 스타일은 바로 핑크 머리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잘 선택한 것 같았다. 튀는 색이니 일탈에 대한 욕구도 만족했고, 색깔도 고우니 맘에 들었다. 핑크 머리를 검색하면 나오는 예쁘고 멋진 아이돌의 사진은 내 선택에 확신을 더해줬다. (얼굴이 준비물이라는 사실은 무시.)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이후로도 많은 고민이 있었다. 주변 친구들은 듣고 오히려 재미있다며 좋아해 주는데 나 스스로 생각이 많았다. 무난함을 추구하는 회사원의 자아로 너무 오랜 기간 살아온 걸까? 내 걱정은 남들의 시선과 닿아 있었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바로 '나이'였다. 20대라고 하기 조금은 민망한, 그렇지만 침을 튀기며 아직 20대라고 주장하고 싶은 나는, 당시 29살이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 탈색은 20대 초 청춘, 풋풋함의 전유물이었다. '튀는 머리'에 대한 욕구는 사회로 섞여 들면서 자연히 사라지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케케묵은 걱정을 할 줄 몰랐지만 이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사람들이 나잇값 못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어쩌나. 사그라들 줄 알았던 욕망은 20대 극 후반인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것을. 그리고 이 고민은 하면 할수록 답이 없었다. 내 머리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모두 수렴해서 모양을 결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튀면 튄다고, 무난하면 너무 무난하다고, 다들 제멋대로 생각할 거고 그건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이다. 나이가 걱정인 건 올해도 내년도 내후년도, 매년 똑같을 거다. 내가 뭔가를 포기하는 이유를 '나이'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내 생애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니 가장 젊을 때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첫 번째 걱정거리를 물리치고 나니 남은 두 번째 걱정거리는 사뭇 가벼워 보였다. 바로 ‘머릿결’. 탈색하면 개털 된다던데 한 달을 위해 돈과 내 머릿결을 희생시키는 게 맞나? 답은 간단했다. 머리는 자라니까 괜찮아! 단 한 달뿐 이라고 해도, 아니, 단 한 달 뿐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한 달이니까. 누군가는 괴상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고, 나잇값을 못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내 소원을 이뤄주는 게 내게는 제일 중요했다. 소원의 대가가 머릿결이라도 뭐 어때. 시간이 지나면 머릿결은 돌아오겠지만, 한 달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고작 머릿결이 해방감과 일탈이라는 짜릿함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싸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나름의 질문에 대해 답을 찾은 후, 미용실로 향했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분홍색 머리 해주세요. 탈색은 색깔이 나올 때까지 해주세요. 머릿결은 상관없어요!’라고 말하는 기분은 꽤나 짜릿했다. 미용실 의자에 앉으면 언제나 머리 한편에 ‘혹시 망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똬리 틀고 있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망해도, 안 어울려도 정말 상관없었다. 스스로에게 금기시했던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것, 시선의 굴레에서 빠져나오는 것. 그 건 생각보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탈색 약을 발라 놓은 머리에서 점점 검은 물이 빠지며, 익숙하게 여겨왔던 회사원의 나도 함께 희미해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퇴근이 최우선 과제였던 나의 5년이여, 잠시 안녕.


그리고 받아 든 결과는?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잘 적응했다. 미용사 선생님마저도 염색약 바르기 전, '핑크 안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다른 색깔 어떠세요?'라고 찬물을 끼얹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만족도는 100%였다. 분홍 머리를 처음 보는 내 친구들도, 가족들도 처음엔 무척 놀랐지만('헐!', '니가 아이돌이냐?' 등등) 핑크 머리를 엄청나게 자랑스레 여기는 나를 보고는 칭찬해주기 시작했다.


이를 보며 알게 된 것 하나. '안 어울리는 머리는 없다. 안 어울리는 태도만 있을 뿐이다.' 뭔가에 대해 스스로 자신감 없어하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부정적인 표를 던지기 마련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 해도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부정적 목소리를 훨씬 크게 듣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신감은 더 하락한다. 악순환이다. 그러니 이를 뒤집는 거다. 아주 이상한 머리라도, 내가 여기에 만족한다면, 적어도 대놓고 비난을 던질 사람은 없다. '이거 봐! 내 분홍 머리 멋지지!?'라고 기쁨에 차서 말하는 사람에게 누가 쉽게 반대표를 던지겠는가. 설사 던져도 상관없다. 나는 만족으로 가득 찬 사람이니 반대표 따위는 개미보다 작게 들릴 테니.


인생에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분홍 머리 소원 성취와 함께 안식월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내일부터는 출근을 하지 않는다. 이제 분홍 머리를 하고 제주를 누비는 일만 남은 거다. 내 앞에 놓인 모래알 같이 촘촘한 한 달이라는 시간이 기대되어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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