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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세연 Oct 05. 2021

혼자 놀기는 처음이라서요

[휴직 일기] 초라한 게 아니라 새로워질 '혼자'

제주에서 맞는 첫 아침. 계획도, 할 일도 없었다. 월요일인데도 알람을 맞추지 않았다는 것, 피곤한 기색 없이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눈이 떠질 때 일어났다는 것. 하루가 시작되는 방식이 너무나도 낯설었지만 기분은 가뿐하기만 했다. 오늘은 뭘 할까.


앞서 계획이 없다고 한가로운 척을 잔뜩 했지만 사실 반쯤 거짓말이다. 제주에 한 달간 혼자 살 예정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약속했다. 친구와 가족들이 방문하는 며칠간을 달력에 표시하고 보니, 정작 나 홀로 보내는 시간은 2주도 채 되지 않았다. 오늘은 그 귀중한 혼자만의 시간의 첫날이었다. 이틀 후면 바로 아빠와 동생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는 걸 달력에서 확인하고 나니 혼자만의 시간인 오늘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혼자 뭘 하면 좋을까? 침대에 누워 고민을 시작했다. 방문객이 있을 때는 함께 조율해서 일정을 잡아야 하니, 혼자만의 욕구에 귀 기울이기가 어렵다. 동행 없는 여행의 최대 장점인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을 나와 딱 맞는 모습으로 나답게 보내고 싶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제주살이의 시작을 여는 첫날이 아닌가. 특별해야만 했다.

물론 가보고 싶은 멋지고 좋은 곳들의 리스트는 잔뜩 적어왔다. 제주도의 어떤 지역을 찍어도 내 지도에는 미리 표시한 별표가 그득했다. 그중에서 나는 원하는 걸 고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고르려니 ‘혼자’라는 사실이 자꾸 걸리기 시작했다. 내가 준비한 계획들은 너무 멋진 나머지, 혼자서만 즐기기에는 아쉬웠던 거다. 이런 멋진 계획은 경험을 나눌 누군가와 함께 해야만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혼자 홀랑 멋진 곳에 가버리는 건 왠지 앞으로 올 방문객들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갑자기 닥친 ‘혼자’라는 상태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던 거다. 혼자서 뭐든 척척 잘 해내는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는데 그 평가에는 틀린 구석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혼자서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는 것은 잘할 수 있었지만, 혼자를 즐기는 것에는 아직 서툴렀다. 혼자의 레벨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직 하수 중의 하수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며, ‘혼자여도 불구하고 재밌는 게 뭘까?’ 고민하며 세운 여러 계획들을 저울질하는 것은 잠시 멈추기로 했다. 나는 혼자를 즐기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혼자’ 임을 내 핸디캡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함께’가 기대되는 일이 있다면, ‘혼자’라서 더 좋은 일도 분명 있는 법이다. 내 멋진 계획들이 ‘혼자’한다고 해서 망쳐질리는 없었다. 멋진 계획들 앞에 ‘혼자’라는 단어를 붙이면 초라해지는 게 아니라 새로워질지도 몰랐다. ‘혼자’ 멋진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기, ‘혼자’ 걷기, ‘혼자’ 바다 보기, ‘혼자’ 맛집 가기!


굳게 마음을 먹고 첫 번째로 하기로 한 것은 ‘혼자 걷기’였다. 집 근처 탐색을 할 겸 걸어보기로 했다. 마침 집 앞이 올레길 15코스였다. 물통 한 병과 어제 시장에서 산 귤 2개를 가방에 챙겼다. 나가기 전에 혼자라서 찔끔 움츠러들었던 마음은, 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집을 나서자마자 눈에 보이는 파란 바다 덕에 나는 즉행복해졌다. 한 달간 빌린 내 집은 애월 해안도로에 위치해있었기에 집을 나오자마자 바다와 만날 수 있었다. 오른쪽을 바라보면 제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구멍이 풍성한 돌담, 그리고 담 넘어 막막하게 넓은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풀숲을 따라 걸으며 바다가 보고 싶어서, 이 순간이 좋아서, 자주 멈췄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자주 양해를 구해야만 했었을 내 속도는 혼자라서 완벽했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 기억은 자꾸 안으로 파고들었다. 스무 살 무렵, 국토 대장정 프로그램에 참여한 기억이 떠올랐다. 코스에는 의외로 제주도가 포함되어 있어, 하루 종일 질리도록 푸른 바다와 짙은 풀숲을 바라보며 걸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아파트가 빽빽한 도시에서 살았던 나는 하루 종일 푸른빛을 볼 수 있다는 게 좋아서 질리지도 않고 바다를 봤다. 그러다가 바다가 영 파란색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햇빛이 잘게 부서지는 곳은 밝은 에메랄드 색, 수평선 언저리의 깊은 바다는 짙은 쪽빛, 해변으로 잘게 부서지는 물결은 투명한 흰색. 그 발견 덕에 하루 온종일 걷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29살, 9년이 지나 걷는 제주도의 바다는 여전히 바라볼수록 새로운 색채를 내게 선물해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카페에 들렀다. 말동무가 없으니 자연스레 커피와 함께 책을 펼쳤다. 문득 마주한 구절에 혼자 잠시 멍해진다. 누군가와 함께 였다면 역시 ‘너무 좋지 않니?’ 호들갑을 떨었을 테다. 상대가 끄덕여준다면 멋진 구절을 상대에게 선물한 기분에 행복이 배가 되기도 했을 거다. 그렇지만 만약 상대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하다면, 기대한 만큼 나의 세계에 쉽사리 도달하지 못한다면 맥이 탁 풀리기도 했을 거다. 나는 오롯이 혼자였기에 그저 책과 내가 정면으로 마주친 그 순간에 조용히 잠겨 들 수 있었다. 눈으로 따라도 읽어보고 속으로 읊조려도 보며 오래오래 문장의 생김새를 곱씹었다.


혼자서 여기저기를 거닐다가 피곤해지자 집에 돌아왔다. 역시 혼자의 좋은 점. 기분과 몸 상태가 내키는 대로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 오늘은 한 달 살기의 첫날이니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목욕물을 받았다. 욕조 한 켠의 창문으로 따끈하게 잘 익은 해가 바닷속으로 잠기는 모습이 보인다. 방금 욕조에 풀어둔 입욕제처럼, 해도 스르르 바다에 풀어질 것만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바다도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 정말 좋은 삶이다. 듣는 사람은 없지만 어떻게든 내 행복은 표현해야 했으므로 혼자 중얼거려본다.


슬렁슬렁 휴대폰으로 SNS를 탐방하다가 눈에 띄는 소식을 발견한다. 눈여겨보고 있던 한 독립 서점에서 심야 운영을 한다고 팝업 공지를 띄운 거다. 조용히 각자의 마실 거리를 챙겨 모여서 2~3시간 동안 책을 읽고 헤어지는 게릴라성 모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의 시간을 마무리하기에 최고였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모임이 나타난 건지 신통방통할 정도였다. 이거라면 당장 가야지! 하고 결심하고 위치를 확인해보니, 장벽이 있었다. 차로 왕복 2시간. 초보 운전자에게 야간 운전 2시간은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혼자라서 조금은 맹숭맹숭했던 이 하루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이 모임은 필수적이었고 나는 결국 이 리스크는 감수하기로 한다.


초보 운전자가 진땀 흘려 도착한 만춘 서점은 예상대로 좋았다. 꽤나 SNS에서 유명한 서점이었기 때문에 모임의 참석자가 많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날의 참석자는 나뿐이었다. 희붐한 불빛을 밝힌 아늑한 서점에 전혀 서로를 모르는 두 사람이 단지 책을 읽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책을 두 어장 넘기고서 이 모임은 정기적으로 하시는지와 같은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던진 것을 계기로 심야의 독서회는 수다회로 바뀌었다. 수다회를 통해 얻은 게 많았다. 심야의 만춘 서점이라는 게릴라성 모임은 서점 알바생께서 책을 읽고 싶을 때 비 정기적으로 여는 모임이란다. 가끔 새벽까지 서점에 불을 밝히며 책을 읽고, 밤의 해변을 산책하는 제주도민의 삶은 어떤 걸까. 혼자 상상하며 잠시 부러워졌다. 그렇지만 ‘앞으로 한 달간 나도 그런 삶을 잠시 체험할 수 있지.’ 하고 끄덕이며 도민 추천 맛집을 한가득 얻어오는 것을 끝으로 책방 문을 나섰다.


혼자를 즐기겠다고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지낸 하루였다. 각오만큼 멋지게 즐겨냈는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미친 듯이 즐겁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삐져나온 말에 어떠한 메아리도 응답하지 않을 때는 잠시 허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속도에 맞춰 하루를 천천히 흘러가는 건 분명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마치 힘을 빼고 천천히 흘러가는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처럼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편안함은 내 감정을 더욱 잘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좋은 글을 읽을 때, 바다를 가만히 바라볼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라는 사람을 오랜만에 찬찬히 바라보았다. 자유로운 마음은 내가 예상치 못한 곳까지 나를 이끌어주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즐기게 했다. 모두 혼자가 아니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이렇게 돌아보니 혼자의 시간을 왜 그리 겁냈나 우습기도 하다. 혼자든 함께든 자유롭고 편안한 사람이고 싶다고 역시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지만 속엣말로 결심을 되뇌어 보며 혼자의 하루를 끝마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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