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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시스템이 문제다

나는 왜 회사에 가고 싶어졌을까? - 1

Informational interview를 하든 실제 구직 인터뷰든 언제나 받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넌 왜 회사에 가기로 했니?' 당연히 모범 답안이 준비되어 있다. "I would like to work in a team-oriented environment, and I want my work to be translational."



회사에 있는 사람이면 다들 동의할 만한 무난한 답변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터뷰를 위해 준비 대답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실제로 내가 회사에 가고 싶은 큰 이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솔직하게 밝힐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 이유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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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가기로 결정한 순간이라던가 계기가 있던 건 아니었다. 학계가 내 길이고 회사는 내 길이 아니라는 오랜 생각 사이에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틈이 생겼다. 어느새 나는 회사에 꼭 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졌고, 구직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증가하는 불안함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 모든 생각의 변화가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급격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미국 시골의 꽤 괜찮은 대학교에서 포닥(박사 후 연구원)으로 연구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회사에서의 커리어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난 글에 정리한 것처럼, 나는 학계에서의 자유롭고 열정적인 연구 활동이 좋았다. 포닥 4년 차 때 막 박사학위를 받은 같은 연구실 대학원생이 내 연봉의 두 배가 넘는 돈을 받고 회사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랐지만 부럽지 않았다. 저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도 있구나 하고 신기했을 뿐이다. 유능한 나의 포닥 지도교수가 학계 내 정치 문제로 학계에서의 삶에 좌절을 느끼며 신세한탄을 할 때에도 학계를 떠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원어민이고 정말 똑똑한 저 사람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내가 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우리 연구실에 있던 대학원생들은 모두 졸업하면 당연히 회사로 갈 거라고 말했다. 대학원생이라 그러려니 했다. 내가 대학원 때를 생각해 보면 애초에 내 주변에서 박사학위 후 포닥을 하는 비율이 매우 낮았다. 포닥을 하는 극소수의 사람이면 당연히 학계에 남겠지 하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그러다 대도시의 유명한 학교/연구소의 유명한 연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무리 괜찮은 곳이었다고 해도 작은 시골마을 대학의 연구실과 대도시의 그곳은 연구의 규모부터 접근가능한 자원 등 많은 것이 달랐다. 가장 놀랐던 것은 연구실 내 포닥의 수와 비율이었고, 그들의 과학적 역량(?)이었다. 연구를 수행하고, 이끌어가고, 토론하고, 발표하는 수준이 내가 경험해 온 것들과 차원이 달랐다. 학과세미나를 보는 느낌이었달까. 장차 학계를 이끌어 갈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포닥들이 하나 둘 연구실을 그만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지 않고, 논문을 내지 않고 회사로 갔다. 알고 보니 우리 연구실 포닥들의 turn over time (회전 주기?)은 꽤 짧았다. 이유는 다양했지만, 딱 교수를 할 것처럼 너무나 출중한 능력의 그 포닥들이 회사로 갔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 많은 학문적 호기심과 열정, 그리고 능력을 가지고 회사로 간다고? 논문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회사를 가는 것도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생각의 틈이 생겼던 것 같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교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접고, 지금 있는 곳에서 연구원으로 쭉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연구실에서는 나를 연구원으로 데리고 있고 싶어 했다. 뭐 회사에 비하면 돈을 많이 벌진 못하지만, 적당히 괜찮은 연봉을 받으며 자유롭게 계속 연구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에는 학계에 남는 길 밖에 몰랐기에 학계에 남아 있었지만, 학계가 아닌 길을 알게 되었어도 학계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생각이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건강과 돈, 학계의 시스템 등이 복잡하게 얽혀 나를 흔들었다. 여기 있는 것이 맞는지 다시 잘 생각해 보라고. 연구실의 포닥들이 하나같이 지적했던 우리 연구실만의 그 문제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그 누구보다 프로젝트가 빠르게 잘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의 오만함이었다.



우리 연구실이 개인의 자유도를 침해(?)하는 방식은 독특했다. 그 방식은, 내가 들어왔던 회사에서의 방식과 같았다. 물론 학계의 포닥(그리고 연구원이나 대학원생)들도 결국 교수나 연구책임자가 하고 싶은 일을 맡아서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자유롭게 파고들며 자신의 프로젝트를 이끌어갈 수 있다. 하라는 것만 일일이 지시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통해 연구의 세부 내용뿐 아니라 방향까지도 관여한다는 말이다. (물론 나의 좁은 세상 안에서의 경험이 바탕이 된 생각이므로 늘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러 전문성을 가진 팀으로 이루어진 회사의 한 그룹만큼의 규모와 다양한 전문성을 갖춘 우리 연구실에서는 회사의 방식으로 구성원들이 할 일을 지시했다. 높은 위치의 (소수의) 결정권자가 원하는 방향이나 관심사에 따라 이것을 하다가 저것을 해야 했다. 내가 모르는 내 프로젝트의 새로운 큰 그림과 방향을 나중에 알게 되는 일이 생겼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내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드물지만 가끔은 경쟁을 시키기도 했다. 한 개인이 각각의 프로젝트의 리드로서 중요한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냥 연구실의 소수의 이득을 위한 값싸고 성능 좋은 하나의 부품이 된 것 같았다. 그제야 다른 포닥들이 한 말이 이해가 되었다. 불안감이 느껴졌다. 더 좋은 성능을 가진 사람으로 언제든지 쉽게 대체되겠구나 하는 불안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교수가 되지 않는 이상, 내가 누군가의 연구실의 일원으로 있는 이상 나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한정적이라는 것. 연구실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정도와 방식에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1인독재체제인 학계의 연구실에서는 개인을 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위험이 존재한다.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개인의 삶이 너무나 크게 좌우되는 것을 직, 간접적으로 경험해 왔다. 나는 학계에는 그 개인을 보호할 시스템이 거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나를 보호해 줄 시스템의 부재가 조금 더 치명적인 환경에 있음을 알았다.



자유롭게 파고들며 연구하는 재미없이, 프로젝트 리드로서의 인정 없이 이렇게 부품처럼 일한다면 여기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있는 것처럼 일할 거면 진짜 회사로 가서 돈이라도 많이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다른 글을 통해 정리하겠지만 학계라고 다 이런 것은 아니듯이 (대부분 그럴 것 같긴 하지만), 회사라고 다 부품처럼 자유롭게 연구하는 재미없이 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연구실의 운영 방식에 휘둘리면서 얻은 큰 수확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이런 환경에서 나의 존재감이 없어지지 않도록 머리를 많이 굴리다 보니 좋은 성과가 있었다. 그런 환경적인 스트레스가 없이도 같은 성과를 이룰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이건 어쩌다 얻은 수확. 둘째로 협업의 큰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다. 여기저기 투입되고, 여러 사람들이 나의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환경에서 서로가 잘 살아남기 위해(?) 많은 토론을 했다. 나와 다른 전문성, 다른 전문언어를 가진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것,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가는 것,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 내 능력의 부족함을 느끼며 좌절한 적도 많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는 과정은 배움과 놀라움이 가득한 즐거운 순간이었다. 회사의 성격을 가진 연구실에 있었기에 얻은 경험이었다. 회사에 가서 이런 협업의 기회를 더 많이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돈도 더 받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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