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의미가 있기를

나는 왜 회사에 가고 싶어졌을까? - 2

어려서부터 몸으로 하는 일들을 꽤 잘했다. 긴 공백 후에도 언제나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었다. 언제든지 마음먹고 다시 돌아가면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나 또한 시간의 흐름에 거슬러 젊고 건강하고 자유로운 몸을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서일 수도 있고, 출산 후 몇 년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몸을 챙기지 않은 어린 시절의 나쁜 행동들이 쌓여서일 수도 있고,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그냥 그렇게 태어나서일 수도 있고, 그냥 특별한 이유 없이 그만큼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3년간은 몸이 힘들지만 마음도 많이 힘들 수 있는 시기이다. 정말 힘들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힘들었다. 나만 힘든 것 같아 더 괴로운 시간이었다. 마음이 힘들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조금씩 '이유'를 보탰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너무 많은 문제가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



몸의 이곳저곳에 이상한 증상들이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생각은 어느새 불안함으로, 그리고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병원을 찾아다니는 것은 큰 일이었다. 병원비가 아주 비싼 것은 둘째 치고, 미묘하고 복잡한 증상과 통증, 이상함을 설명하기에 내 영어가 부족해서 답답했다. 어찌어찌 설명하고 검사를 받고, 또 새로운 검사를 받고, 또 새로운 검사를 받는 과정은 정말 더디게 진행되었다. 나름 괜찮은 보험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의사를 만나는 일이 정말 쉽지 않았다. 이러다 병을 키우는 게 아니냐는 걱정도 들었다.



무서웠다. 의사를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무서웠다. 검사를 기다리며 혼자 누워있는 방 안에서 무서웠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무서웠다. 병원을 찾아다니며 만나는 아픈 사람들을 보면서 무서웠다. 아이를 생각하며 무서웠다. 아이를 생각하며 무서웠다. 아이를 생각하며 무서웠다. 무서움 속에서 외로웠다. 인간은 철저히 혼자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는 동안,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든 나중이든 늙고 병들 나에게 돈이 없다면'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충분한 돈을 모아둬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초조하게 했다. 연구실에서의 상황과 여러 가지가 함께 맞물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변했다. 학계를 떠나 회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병원을 수없이 다니면서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 외에 다른 한 가지 생각이 힘을 키워갔다. 바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에 대해 많은 것을 깊이 탐구하고 지식의 발전에 기여하는 과학자이지만, 내 경험과 지식은 내가 아픈 순간에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나는 오로지 의사와 간호사의 말과 판단에 의지했다. 그들의 말과 반응에 안도했고, 절망했다. 누군가의 차가운 태도와 말투에 더욱 속상했고, 누군가의 따뜻한 말에 울었다. 많이 걱정되지, 많이 무섭지, 이제 안심이야, 힘들었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고, 그 기술과 따뜻한 마음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물론 의학의 발전을 위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병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고 의사가 답해줄 수 없는 것들은 결국 과학자들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좋은 치료법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밝혀내는 것도, 상상할 수 없던 치료법을 만들어내는 것도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의학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전 분야의 끈질기고 집요한 노력을 토대로 발전한다. 그러니 과학자로서 내가 하는 일은 분명히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재미'로 기초과학 연구를 하는 스스로에 대한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명감'이 아닌 '재미'로 했어도 내가 하는 연구가 분명 세상에 기여하는 바가 있음을 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기여이든, 내가 살아있는 동안 알 수 있는 기여이든, 내가 죽고 한참이 지나서야 쓸모가 있든.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에 내가 가진 재능과 자원을 한정된 곳에만 쓸 수 있다면 조금 더 내가 그 기여도를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계보다는 실제 세상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하려는 (그게 돈이 더 되기도 하니까) 회사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큰 일의 작은 부품이 되더라도, 나의 일이 조금 더 지금의 현실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회사에 왜 가고 싶니?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게 조금씩 준비되었다.



"I want my work to be translational."




매거진의 이전글 결국엔 시스템이 문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