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이렇게 길게 쓰라고 한 적은 없는 2024년 회고
2024년은.. 정말 힘든 한 해였다. 작년이 인생 시즌2 첫 에피소드였다면 올해는 2-4회 정도 되는 것 같다. 사람 고구마 100개 맥이고 시청자들이 주인공한테 정 떨어졌다가 약간 노잼됐다가 그러는 시기..
올해 이전까지는 많은 문제로부터 잘 도망다녔다. 혹은 아주 예외적으로 운이 좋아서 도망갈 필요가 많이 없기도 했다. 올해는 그간의 부채를 갚듯 도망갈 곳 없이 인생의 기본 과제에 대한 도전들이 내 의지와 관계 없이 찾아왔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 없는 곳에서 혼자 인생을 세우겠다는 결심에 대한 책임, 가족들이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줄 수 없다는 영영 해결되지 않을 죄책감,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었는데도 남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연인/친구들에게 둘러쌓여있어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른채 나 자신을 과신했던 오만. 모든 것에 대해 이자까지 쳐서 갚고 있다. 내가 올해 감사하는 것은, 나는 여기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우주가 나를 줘패는 것 같은 때에도 나는 건강한 밥을 성실히 챙겨 먹었고 운동을 빼먹지 않고 했고 내 찻잔 안의 작은 폭풍을 충실하게 견뎠다.
2024년에 타인에게 나를 맞추려던 모든 시도들을 두고 간다. 새로 가는 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엄청나게 많은 훈련을 한 것 같다. 구질구질하고, 진짜 나 자신이 너무 싫고 왜 이러나 싶고, 이 세상에서 그저 사라지고 싶었던 2024년의 모든 순간들을 안고서, 그저 더 나다울 2025년으로 간다. 제발~!
인생에 아쉬움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 과정에서 완전히 지침
유투브 롱폼 시도해봤다가 귀찮아서 장렬하게 접음ㅠ 찬조출연해준 지영님 고맙습니다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짐
새 남자친구가 생겼고 역대 가장 고통스럽게 헤어짐. 역대 최단 기간(6개월)
미국식 무도회에 가봄
먼 친척의 죽음으로 상속 전쟁 발발
나도 스트레스 받아서 엄마를 들들 볶음
할머니와 이모의 2주간 방문
요가, 필라테스 등 잘 안하던 운동을 경험함
친구들과 이런저런 갈등도 있었음
팔에 꽤 마음에 드는 새 타투를 했음. 엄마 아빠의 손글씨 레터링 타투!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에서 1박 2일 백패킹을 함
태어나서 처음으로 펑크난 차를 몰아봤고 그걸로 1박 2일을 통째로 날려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로윈에 뭔가를 해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내 생일파티를 개최해보았다
2년간 고민하다가 차를 샀음. 그런데 두 달만에 팔았음.
그 이유는 뉴욕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임..!
약 50분과의 커피챗
늘 벼르고 있었던 10K 스터디를 시작함
3월에 AWSKRUG를 통해서 정말 많은 여성 엔지니어 분들과 만났음
오랜만에 긴 시리즈 글쓰기를 했음 - "미국에 사는 것 어떻냐는 질문에 대한 아주 긴 답변"
올해 초 reorg가 있었지만 꽤나 잘 적응해서 대내외로 셀프 브랜드를 쌓았음
죽지도 않고 또 리인벤트에 다녀옴
1/ 야심이 크다는 것은 마음의 구멍이 크다는 의미이다. 그대우 역시 참인데, 마음의 구멍이 크지 않으면 야심도 크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다지 야심이 없는 이 시기를 감사하게 지나가고 싶다.
2/ 자기효능감과 통제감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새삼 와닿았다. 나는 통제감이 하나도 없는 생활을 해서 효능감이 많이 떨어졌구나. 좀 better disciplined 한 생활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chill and relaxed soul 로 사는 거 다 좋은데 좀 적당히 해야 됨.
3/ 내가 생각보다 사람들을 훨씬 더 많이 좋아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많은 위안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반면 그들이 나에게 행복을 떠먹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독립적이라는 환상을 갖고 살았으면서 왜 그랬을까..? 나를 위한 행복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백패킹, 할로윈파티, 생일파티 개최 등을 해보았다. 결과는 대만족!
4/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가족, 친구, 연인들에게 받으며 자랐는지 깨달았다. 나의 가장 큰 인간적 매력은 어쩌면 나의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는 것인데, 내가 내 모든 상처와 흉터를 보여주어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진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완전히 무너지더라도 정말 내 밑바닥의 모든 것까지 다 보여줘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5/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운이 좋은 인생이다. 내가 우울할 때 사람들 속으로 도망가게 된 건 내가 운이 좋게 살았기 때문이다.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이야기할 수 있었고 만약에 그렇지 않을 때에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귀인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 속으로 도망가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억겹의 행운이 쌓여서 만든 연약한 성인 것이다.
6/ 얼마나 타인지향적으로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남자친구라는 타인에 쏟으며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했는지, 스스로의 진짜 요구를 살피고 표현하는 것을 잘하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는지 깨달았다. 딜라주에게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못해서 계기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내가 의를 저버리게 될 것 같은 때가 돼서야 헤어지자고 말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는 상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고, 내가 타인으로부터 거리가 필요할 때 그것을 요구하지 못했다.
갑자기 벅차오르는 덕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올해의 컨텐츠 부문... 너무 무거워진 나머지 마지막으로 배치
올해 가장 감명 깊게 본 드라마들은 모두 일본 드라마네.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을 봤다. 회차당 30분, 총 8회로 아주 짧은 드라마였다. 부모에게 버림 받고 할머니와 평생을 살고 할머니의 집을 지키며 사는 타카하시, 도무지 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는 자기 자신이 의문스러운 사쿠코가 임시 가족이 되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으로, 키스도 섹스도 왜 하는지, 연애를 사람들이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각자의 공간에서 외계인인 것처럼 살다가 우연찮게 서로를 만나게 되어 ‘연애 감정 없는’ 가족이 될 수 있을지 탐구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2022년에 나온 이 드라마는 일단 에이섹슈얼이라는, 미디어에서 상대적으로 아주 적게 다루어진 성정체성을 다룬다. 이게 지금 나에게 아주 흥미로운 이유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연애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금쪽상담소, 고딩엄빠 같이 파탄 일보 직전의 가족 컨텐츠가 흘러나오고, 현실에는 1인 가구는 너무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이 세상에 “가족이 뭔데?”라는 너무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자신은 연애 감정도 모르고 연애를 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렇게 앞으로 평생 혼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외롭다는 사쿠코의 말에, 타카하시도 조모의 빈 자리를 느끼던 차, 임시로 연애 감정 없는 가족이 될 수 있을지 탐구하기 위해 같이 살기 시작한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연인이냐는 말을 듣게 되고, 결혼하고 선 보라는 주변의 채근에서 자유로워진다.
타카하시는 상대적으로 일찍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깨닫고, 늘 다른 사람들의 ‘평범한’ 기준이 무심하고 잔인하게 툭툭 튀어나올 때 늘 앙칼진 고양이처럼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타카하시가 사쿠코의 남자친구인 척을 하러 사쿠코 본가에 갔다가 결국 사쿠코가 부모님과 싸우게 되었을 때, 자신을 옹호하는 사쿠코를 보고 ‘누군가에게 보호 받는다는 감각’은 정말 오랜만이라고 고맙다고 말한다.
마지막에는 같이 살지 않는 것도 가족이냐는 큰 물음이 하늘에서 벼락 같이 떨어진다. 이 극에서의 답은 예스. 왜냐면 우리는 가족으로서 구성원이 정말로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라고, 그것을 장려하고 싶고, 그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자기 자신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지는 않고, 그 여정에서 지쳐버린다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 되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타인이라는 지옥, 타인이라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자극, 타인이라는 행복의 압정,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해체되어가는 이 세상에서 내가 선택하는 가족이란 뭔지 묻는 좋은 작품이었다.
이 책을 다른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읽는 내내 꽤 괴로웠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불행포르노라고 엄청나게 욕을 먹어왔는데, 불행포르노에 상당히 민감한 나는 오히려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이 책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슬픔을 담고자 한 시도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 슬픔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담겼다. 그래서 괴롭고 슬펐지만 동시에 아주 아름다운 책이었다.
한 작가가 이 모든 슬픔을 어떻게 알 수 있을지 궁금해질 정도로 이 책에는 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슬픔이 다 담겼다. 아동학대를 당한 아이의 슬픔, 희망인 줄 알았던 존재에게 배신 당하는 슬픔,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는데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슬픔, 친구들은 다 자기 살 길 찾아나서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럴 수 없는 슬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느끼는 슬픔, 자식을 잃은 슬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슬픔,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그를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입다물고 마는 슬픔, 그리고 자기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을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슬픔, 인생의 사랑을 잃는 슬픔, 진심을 다하여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이 스스로 죽기를 선택하는 슬픔, 이외에도 말하지 못할 많은 슬픔이 여기에 가득 담겼다. 그리고 마지막 결말을 읽으며 참담해지는 독자의 슬픔을 마지막으로 작가는 이 세상의 모든 슬픔 긁어모으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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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유투브에서 보고 영업 당해서 사게 된 책인데, 정말 문장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아름다웠다. 이 책은 '상실'과 '발견' 두 큰 갈래로 나뉘는데, 유투브에서 나온 직원 분이 발견 부분 나올 때 너무 스윗해서 상실 부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신 것에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부모를 잃거나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건 누구나 겪는 보편적 사건들이다. 이런 마음을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근데 눈물나게 아름답게 남길 수 있다는 것, 그걸 글로 쓸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전혀 다른 세대/지역 배경의 나 같은 사람까지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게 진짜 레전드임ㅠ
아름다운 문장 소개에 앞서 일단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어떤 감정들은 비협조적이라는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분노는 오직 분노하기만을 원한다. 지루함은 지루함을 완파해줄지도 모르는 수단들이 전부 지루하다며 거부한다. 외로움은 외로이 남겨지기만을 원한다. 그리고 슬픔은, 앞에서 말했듯 오직 슬퍼하기만을 원하는 스스로를 배신할 생각이 없다.
상실 부분 -
마치 웅덩이에 빠져 있듯 슬픔에 푹 빠졌던 날들이 온전히 기억나는데, 그 슬픔이 너무나 선명하고 순전해서 안부를 묻거나 무슨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나 그냥 슬퍼.”뿐이었다. 어떤 날에는 그 감정의 더 지독한 형태에 삼켜진 것 같았던 기억도 난다.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상실이 거대한 파도처럼 솟아올라 나를 집어삼키는 형태, 애도는 그러하리라 늘 생각했던 형태였다. 하지만 웅덩이건 파도건, 애도하는 나를 단골로 찾아오지는 않았다.
발견 부분 -
그때 나는 C가 요정처럼 가냘픈 몸집을 지녔지만 열여섯 살 소년의 신진대사 능력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참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배고파 죽겠다고 외치고는 침실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있었다. 이제 그녀는 스툴에 걸터앉아 무릎에 접시를 올려놓고 여덟 장째, 혹은 아홉 장째 팬케이크를 침착하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카운터 위에는 잼 병이 열려 있었다. 희미한 밀가루 냄새와 버터 냄새가 가득했다. 창문에 이 풍경 전체가 어둠 속에서 금빛으로 일렁이며 비쳐 있었다. 내 행복이 너무나 커다래서 완전한 제삼자가 거기 우리 옆에 서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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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잘 지내온 나 자신아 너무 고맙고 내년에는 더 많이 웃고 천진함을 잃지 말고 새로운 도전을 더 많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