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깊이 사랑했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주고 싶었던 그때, 나는 책으로부터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하필이면 책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끼다니.
그 이유인즉 사랑 앞에서 책은 한낱 종이 한 장, 글자 한 자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혹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찰나의 순간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어서 잠시 책을 멀리했을지도 모른다.
스무 살 이후로 책을 자주 들춰보았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죽은 자들과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감각을 앉은 자리에서 느낀다는 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책으로부터 받은 만큼이나 마음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뒤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전부가 담겼다고 굳게 믿었던 책이, 내가 실제로 경험하는 일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의문이 어이없었고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결국은 글자뿐인 의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한동안 한 사람을 열렬히 사랑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 시간만큼은 한 글자도 쓰거나 읽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무나 충만했으니까.
하지만 사랑의 충만함은 영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끝났고 어느 순간 혼자가 되었다. 이별의 고통과 외로움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누구도 대신 견뎌줄 수 없었다. 그때 다시 책을 손에 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별말을 하지 않은 채 글자만 읽었다.
책은 보폭을 맞춰서 걷기도,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어주기도 했다. 자신의 지난 사랑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이기도, 지독한 첫사랑의 열병을 토해내듯 말해주기도 했다.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누군가에게도, 지구 반대편에 사는 누군가에게도, 나와 마주칠 가능성이 희박한 누군가에게도 이별은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괴로움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었다.
어떤 우연에 의해 책을 펼쳤다. 책은 세계에 깊숙이 빠져보기로 한 사람에게 반드시 무언가를 주었다. 그 이후로도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의미에 매달리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아직도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