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번호 1438번. 대기표를 받은 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 이렇게 많아?” 한숨을 내쉬고는 주머니 속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어수선한 이곳은 한 문예지 신인상 응모 현장. 미등단 작가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장소다. 접수처에 모인 이들은 자신을 과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일필휘지로 작품을 완성했던 영웅담, 문단 내 라인 타기, 신인상 내정설까지. 경쟁자들의 기세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럴수록 단은 손에 든 원고 봉투를 꽉 쥐었다. 지난한 습작기를 거쳐 잉태한 작품이었다. 이번만큼은 배신할 리 없다고, 단은 생각했다.
단은 무면허 작가다. 등단의 문턱을 수년째 넘지 못했다. 다른 방법을 궁리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애매하다.” 다시 제로부터 시작했다. 각종 당선자의 글을 필사했고, 문단을 뜯어보면서 등단과 미등단을 구분 짓는 요인을 분석했다. 작가 커뮤니티에 습작을 올려 주기적으로 반응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단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작가라는 명함을 가진 이들과 자신의 차이점은 등단 여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자기합리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등단 작가의 날이 무뎌진 느낌도 들었다. 단은 원인 모를 이물감의 출처를 추적했다. 이윽고 그것이 당선자들의 공통점에서 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고와 신체가 등단형으로 변했다는 공통점. 문단 입장권을 받는 지름길은 내면의 이끌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효율성 아래서 모범답안에 기준을 맞추다 보면 재능이 비슷한 방향으로 굴절됐다. 굴절되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이 과정에서 글쓰기를 아예 관두는 작가들도 더러 있으니까. 재능이 제도를 뛰어넘는 탁월함은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명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법이다. 승자독식 세계에서 낙선 작가는 그림자일 뿐이었다. 그늘에서 그림자는 존재감이 없지만, 태양 아래서 그림자는 선명해지지 않던가. 모두가 문단이라는 제도권에 진입하려는 이유였다. 그것은 존재감을 담보한 싸움이자 처절한 인정 투쟁이었다. 그래서 단은 올해도 등단으로 향하는 문을 두드렸다. 창작의 고통보다 미등단의 흉터가 깊어지던 때였다. 단은 어금니를 악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번호가 불렸다. “1438번 지원자. 접수처로 오세요.”
시간이 흘러 신인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또다시 이름 없는 명단을 마주한 날이었다. 단은 더 이상 등단의 문이 열리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면허증 없이 달릴 수 있는 도로를 찾아 나섰다. 스스로 작가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문단 밖이라도 독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게릴라전을 치를 수 있지 않을까. 제도권의 인정이라는 훈장이 없어도 글은 글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자 단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다음 날, 단의 블로그에 새 글이 올라왔다.
얼마 후 댓글 하나가 달렸다.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