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은창 Sep 29. 2024

취향과 선호


연주활동 말고도 음악을 가르치는 일을 이십 년쯤하고 있습니다. 여러 학교의 실용음악학과에서 강사로 많은 학생들을 만나왔습니다. 실용음악은 사실 워낙 폭넓은 전공이라 한 학과로 묶어 수업하는 데에 어려움이 좀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과 비교를 해보면 바로 이해가 갈 텐데요, 음악 대학 안에 성악과, 피아노과, 관현악과, 작곡과 등으로 학과가 나뉘어 있는 것에 비해 실용음악은 보컬, 기악, 작곡 등의 세부전공이 한 학과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각자의 취향에 따라 공부하고 싶은 스타일이 제각각인데, 그러다 보니 어떤 학생이건 교과과정에 얼마간의 불만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 됩니다. 아, 이건 학생이라면 당연한 걸까요?


이제는 대학원생을 상대로 재즈만 가르치는 학과를 운영하는 입장이 되어서, 그런 미묘한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어 무척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딱히 재즈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에게 억지로 재즈 공부를 시키는 것은 서로 불편한 일이니까요. 


제가 만나는 학생들 중에는 학생이라고 부르기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훌륭한 음악인들도 제법 섞여있습니다. 학부를 미국이나 유럽의 좋은 학교에서 마치고 한동안 활동을 하다가 뒤늦게 석사 학위를 취득하려고 오는 친구들도 있고요. 그런 이들을 학생으로 맞아들이면 왠지 부끄럽고 움츠러드는 마음이 드는 걸 피할 수 없습니다. 


아니면, 치열한 입시 경쟁을 지나 각자의 학교에서 학부 과정을 마치고는 어느 시점에 재즈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진학을 하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재즈 같은 고리타분한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겠지만, 학교를 다니며 계속 노출되고 하다 보면 언젠가 매료되기도 합니다. 최소한 ‘저걸 열심히 공부하면 뭔가 내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장르입니다. 연주자 입장에서 듣자면 뭔가 있어 보이는 그런 음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학생들에게 각자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라고 반쯤은 강제하고 있습니다. 재즈라는 음악 자체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대로, 느껴지고 상상하는 대로 주저하지 않고 표현하기를 요구하는 음악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소심하기 그지없다가 악기만 잡으면 돌변하는 사람도 가끔씩 있지만, 대체로는 자기 자신의 성격대로 연주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강의실에서 주저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을 익숙하게 하다 보면 이내 합주실에서의 소리가 달라지는 것을 반복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니 자꾸 걸러내지 말고 일단 이야기를 꺼내봐라, 하는 얘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합니다. 짧으면 몇 주 안에, 보통 한두 학기가 지나갈 때쯤이면 수업도 연주도 자기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모두에게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음악 안에는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 취향 혹은 선호에 해당하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애씁니다. 즉흥연주는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인데, 다행히도 음악 안에서의 선택은 인생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법칙 같은 게 있다면 아마도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 같은 도덕적인 것이거나,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면 멈춰 서야 한다’ 같은 것이겠지요. 그런 것에 비하면 드럼을 어떻게 연주해야 한다거나, 피아노 컴핑을 어떻게 하라는 것 따위는 너무도 사소한 일입니다. 그저 연주하는 이와 듣는 이의 마음에 작은 감정의 변화 정도를 일으키는 것에 불과하고,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나는 학생들에게서는 크고 작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어쩌면 제가 그 두려움을 가장 크고 예민하게 느껴온 사람이라 그들의 두려움을 더 잘 감지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틀린 음을 연주하는 것, 박자가 어긋나는 것, 테크닉이 무너지는 것, 코드 진행을 잊어버리는 것, 손버릇이 반복되는 것 등등 우리는 수많은 두려움을 쌓아왔습니다. 학교에서 음악을 배우는 과정은 늘 부족한 면을 지적받는 것의 연속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종종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선생을 만나는 기간에는 폭언에 가까운 욕을 먹기도 하고, 은근히 자존심을 짓밟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지적받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이 쌓여서인지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는 학생들을 만난 첫 주에는 언제나 이렇게 첫 합주를 시작합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각자의 대답이 다르지만, 보통 소고기, 떡볶이, 치킨, 마라탕 정도가 흔한 대답입니다. 대학원생이라 해도 여전히 학생들입니다.


  “자, 그럼 이제 라이드 심벌을 치는데 머릿속으로는 떡볶이 생각만 하는 거야. 떡볶이, 떡볶이, 하면서 스윙을 쳐 봐.”


시답잖은 얘기 같겠지만, 현장에서 순간적으로 소리가 바뀌는 걸 들으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 혹은 감정을 상상하는 것에 따라 소리가 달라집니다. 스윙 리듬을 연주하는데 듣는 이가 발이나 고개를 까딱거리지 않는다면 미션에 실패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대로 관객의 자세가 조금 삐딱해지고, 다리를 좀 떨면서 발을 4분 음표에 맞춰 슬쩍 구르고 있다면 제대로 연주하고 있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연주자는 절대로 틀리지 않아야 해,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아마도 악기를 통해 전달하게 되는 감정은 긴장과 두려움 같은 것이 전부이겠지요. 즐거움, 흥겨움, 환희, 놀라움, 감격 같은 감정이 담길 틈이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감정이 연주자에게는 없었으니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