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프렌즈
젊음만 믿고 참 많은 걸 유예하고 있다. 지금 당장 해보고 싶은 새로운 일들이 여럿 있지만 더 안정을 찾은 후에, 더 많은 돈을 모은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며 스스로를 달래는 게 익숙하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도 그렇게 자신의 꿈과 욕심을 유예하다가 노인이 되었다.
이젠 여행을 가려면 요실금 기저귀를 챙겨 가야 해서 번거롭고 창피하고, 무릎도 아파서 여행도 귀찮아진 나이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일, 지키고 싶은 자존심, 견딜 수 없는 폭력, 타협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죽으려고 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네 생각밖에 안 하냐며 뜯어말리고, 그래서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다 죽어가는데 웬 이혼이냐며 말린다.
모두가 노인이 되어서도, 자신과 함께 노인이 된 친구의 '돌발' 행동을 말린다. 그렇게 나와 타인으로 인해 내 꿈은 '다 죽어가는 나이'에도 유예된다.
그럼 내 꿈은 도대체 언제 이룰 수 있을까. 언제쯤 나 하고픈대로 인생을 시원하게 질러볼 수 있을까.
이 드라마를 보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젊을 때는 젊으니까, 늙어서는 이제 곧 죽을 거니까 나 자신을 달래 가며 참지 말아야 할 것을 참아왔던 주인공들은 각자 크고 작은 계기를 통해 변화를 위한 다짐을 하게 된다. 새가 되어 자유로워진 엄마를 그리워하며 자신은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던 오랜 다짐을 실천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 무릎이 시릴 정도로 높은 언덕에 위치한 작은 집뿐이지만 그곳에 홀로 편하게 누워 낮잠을 자고, 밥을 먹고 싶을 때 간단히 라면을 끓여 먹는다. 자신이 한평한평 정갈하게 가꿔낸 편안한 아파트는 없지만, 일어나면 물을 찾고 밥때 되면 밥을 찾는 걸로도 모자라 폭언을 퍼붓는 남편도 없다. 그저 자신과 자신의 욕구만이 존재하는 낙원이다. 죽어서야 자유로워진 엄마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먼저 자유로워졌다.
매미가 우는 여름, 좁은 집의 마루에 누워 드르릉 코를 골며 자던 정아를 보며 자꾸만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도 뭉클했던 건 저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대낮의 한잠이 얼마나 별 거였는지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다 같이 늙어서 죽어가는 마당에도 '괜한 짓'이라는 건 없다. 누구나 청춘이라고 부르는 젊음을 지났어도 여전히 나에겐 10년, 20년, 혹은 그보다도 더 길고 짧을 인생이 남아 있으니까. 단 하루를 더 살더라도 어제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이유로도 망설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세월을 차곡차곡 입은 몸과 얼굴로 여전히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주인공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몸과 마음을 함께 하며 젊음을 불태우고 있는 그들의 딸과 아들. 모두 내가 언젠가 살아낼 나이와 삶들이었다. 드라마를 한 편 한 편 이어갈 때마다 지독하게 깊어지는 공감을 끌어안은 채 생각했다. 미뤄도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물론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시작하기엔 가진 게 너무 없어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것부터라도 시작해야겠다고 매일 다짐했다. 요즘 내가 접하는 일들이나 작품들은 나에게 늘 외친다. 오직 오늘뿐. 지금 바로 드럼 학원에 달려가거나 비행기 티켓을 끊을 수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 먹고, 내가 친애하는 친구들에게 사소한 연락을 전하고 내가 사랑하는 우리 고양이와 5분이라도 더 놀아줄 순 있는 게 오늘이라고.
젊음은 영원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에게 인생은 영원하다. 나는 내 인생이 끝난 후를 알지 못하므로. 그러나 그 영원이 언제 영원의 힘을 잃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젊음에 모든 것을 걸진 않되, 영원은 믿으며, 그러니 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행복하고도 지루한 삶을 나로서 채워갈 것이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채로.
내가 아끼는 모든 것들을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는 그 어떤 두려움도 하찮아진다.
소중한 나의 인생이여, 친애하는 나의 젊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