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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 Apr 08. 2021

[OB's시네마] 소울

피트 닥터 <소울>



Epiphany


처음엔 픽사 작품 치고는 설정이 다소 지엽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픽사가 보여준 상상력에 비하면 너무 뻔하고 얄팍해보였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자신만의 불꽃을 발견해야만 태어날 수 있다니. 영영 불꽃이 뭔지 찾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다.


불꽃을 발견하지 못해 태어나지 못했던 22번은 지구에서 그 누구보다 신나보였다. 이미 낡고 닳아버려 귀찮은 것만 많고 기대할 것은 적었던 조 가드너의 영혼 대신, 인생을 처음 살아보는 22번의 영혼이 깃든 조의 몸은 설렘과 기쁨으로 팔랑거렸다.


그동안 조는 친분보다 용건이 중요한 곳에선 필요에 의한 짧은 대화만으로 볼일을 마치곤 했고, 배려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과 싸우기 싫어 그저 적당히 무시해가며 받아줘왔다. 그래서 딱 거기까지였다. 자주 보는 사람들이지만 인연이 생기지 않았고, 친구라 불렀지만 친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생이 처음이라 모든 게 새롭고 신났던 22번은 처음으로 미용실에서 재잘재잘 자기 이야기를 떠들어도 보고, 무례한 친구에게 한방을 먹이기도 한다. 인연이 생겼고, 친구와 싸웠지만 그렇게 진짜 친구가 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조는 자신의 꿈을 이해해주지 않는 엄마를 이해시키려 해본 적이 없었다. 조의 꿈은 늘 엄마의 간섭과 꾸지람에 주눅들어 엄마 앞에만 서면 찌그러진 캔마냥 바닥을 굴렀다. 꿈을 이루기 직전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용기를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22번은 조가 그동안 말하지 못한 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꿈에 대한 조의 진심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여느 때처럼 혼을 낼 줄 알았던 엄마는 조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아빠의 정장을 내어주셨다. 진심을 수십년 간 품어온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몇 시간 전에 지구 땅을 밟은 22번이 해냈다. 


드디어 이뤄진 조와 엄마의 화해에 기쁘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건 내가 바로 조였기 때문일 것이다. 


긴 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없는데, 그간 겪은 게 뭐 얼마나 된다고 벌써 풍화가 되어버린 것일까. 너무 많은 것이 예측 가능해 그것이 맞았는지 틀렸는지조차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부딪칠 생각만 해도 지쳐 포기했다. 뻔하고 빤한 것이 벌써 너무 많아졌다. 이 영화를 다 보기도 전에 뻔할 것 같아 걱정한 것처럼 말이다.


조는 22번이 자신의 주머니에 남기고 간 것들을 피아노 위에 펼쳐놓았다. 따뜻하고 노란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너울거릴 때 함께 춤을 추며 손바닥에 내려 앉은 꽃잎 한 장, 지하철 플랫폼에서 기타케이스를 돈통 삼아 노래하던 가수에게 쪼개주고 온 베이글의 남은 반쪽 같은 것들이었다. 


22번이 시간 낭비를 한다고 생각해 눈여겨 보지 않았던 장면들이 모두 22번의 불꽃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조의 머릿속을 몇몇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지하철 창문 너머로 지던 노을이 뜨거웠고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다 올려다본 하늘이 눈부셨다. 그때마다 조는 희미하게 혹은 크게 미소지었다. 


불꽃이 이는 순간이었다. 내 머릿속에도 비슷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지친 출근길에도 지하철이 한강 다리 위를 건널 때면 햇살이 얼마나 기분 좋게 눈부셨는지. 가을 바람을 만끽하며 자전거를 타던 저녁은 얼마나 행복했는지. 크고 작은 행복들이 생생하게 기억나며 눈물이 났다. 영화에선 '에피파니'가 흘러나왔다.


내 인생의 불꽃은 무엇이었을지 고민하던 머릿속은 불꽃놀이가 펼쳐지던 밤하늘처럼 바뀌었다. 저렇게 많은 불꽃을 품고서, 나는 어디를, 무엇을 바라고 있었던 걸까. 그 무수한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깨닫는 동시에 얼마나 어리석게 행복을 잊어왔는지도 깨달았다.


남과 비교하며 행복을 놓치고 잊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참 꾸준히 어리석었나보다. 그동안 내 손을 스쳐간 꽃잎이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하며 계속 마음이 벅차올랐다. 


행복이 얼마나 지천에 널려 있었으면 행복을 잊을 핑계를 찾았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행복들이 나를 채우고 있었다. 소울이 내게 일깨워준 '진실'이었다. 그 진실 앞에서 나는 내 손바닥에 내려앉은 하얀 꽃잎을 지키기 위해 몇 번이고 손을 꼭 쥐었다. 


그래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 감정을 얼기설기 엮은 글을 남겨둔다. 느슨한 내 손 사이로 무엇이 새어나가고 있는지를 알고, 최선을 다해 붙잡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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