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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 Apr 07. 2021

[OB's시네마] 미나리

정이삭 <미나리>

스포일러 有



천근만근의 무게를 지닌 영화다. 한국의 가난을 다룬 영화를 수없이 봐왔지만 미나리 만큼 내 마음을 짓누른 영화는 처음이었다. 한국에선 사는 게 너무 힘드니 더 나은 삶을 꾸리기 위해 온 가족과 함께 떠난 미국에서도 하릴없이 구질구질하게 사는 모습이 서글퍼서였을까. 그 와중에도 한 푼 아껴보겠다고 그 구질구질한 한국 바가지 하나까지 다 챙겨가서 쓰는 모습이 답답해서였을까. 아니면 그 가난의 흔적들이 너무 익숙해서였을까.


가난을 구질구질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 가난이 무엇인지도 알아서인지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과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 하나에 묻어 있는 가난을 볼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겨우 하나하나 버렸던 가난의 상징들이, 어느날 옷장 문을 열어보니 그대로 들어있는 장면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그 기분이 유독 생생했던 건, 이 영화가 감독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진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들이 지극하게 현실적이면서도, 영화는 날것 그대로의 기억들을 과하지 않게 재현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다. 더 깊고 내밀한 부분을 건드려서 문제 의식을 드러냈을 수도 있겠지만 내겐 이미 이 영화가 지나치게 뜨겁고 무거웠던지라 감독이 그 지질한 삶들을 어느 정도 깊이 이상으론 파지 않고 훑고 가는 구성을 택한 게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영화엔 내가 편하게 다리를 뻗고 앉을 자리 하나가 없다. 주인공 부부는 부화소에서 병아리의 성별을 감별하는 일을 하는데, 그들은 병아리를 물건처럼 집어 들고선 항문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털을 파헤친 뒤 성별을 알아내어 병아리를 분류한다. 그 부화소엔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이 하나 있는데, 어린 아들 데이빗이 그 굴뚝이 뭐냐고 묻자 아빠 제이콥은 수컷 병아리는 쓸모가 없기에 폐기하는 것이라 일러준다. 그러니 우리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아들에게 그런 걸 교훈이랍시고 들려주는 아빠가 못났다고 비난할 수도, 병아리를 물건 취급하며 일하는 부부를 못됐다고 탓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그랬으니까. 그저 그 시절엔 저렇게 사는 게 당연했고 그렇게 사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었을 거라 생각하며 애써 대수롭지않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병아리는 자꾸 등장해서 내 마음을 또 무겁게 깔아 뭉개는 돌덩이가 됐다. 그렇게 병아리를 보며 자란 아이들은, 자본주의가 뭔지 알기도 전에 자본주의를 체득한다.


또 이 영화는 한국 부모가 지닌 특유의 건조함을 너무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담아냈다.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살갑고 따뜻한 부모, 아이들을 honey, sweet heart라고 부르는 다정한 부모를 처음 봤을 때 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부모님이 저렇게 다정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에도 다정한 부모는 자주 등장하지만 왠지 그들이 지닌 다정함은 늘 가식 같았다. 실제가 아닌 대본이 만들어낸 대사이기 때문에 작위적이라고 느끼는 걸 수도 있겠지만, 내가 느낀 가식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대본을 보고 느끼는 일반적인 작위성보다도 더 커다란 것이었다. 


미나리의 모니카와 제이콥 부부는 내 기억속 엄마, 아빠의 모습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그게 나의 부모만이 지닌 특성인지, 다른 이들의 부모의 모습과 혼재된 것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8~90년대에 부모가 된 한국 부모들이 지닌 보편적인 건조함과 미숙함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법을 모르는 아빠. 가끔 다정하고 따뜻하지만 아빠의 훈육을 존중하거나 존중해야만 하기에 아빠의 큰 소리 뒤에 서서 그것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엄마. 어른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가장 큰 불손으로 여기고 처벌을 일삼는 부모. 나는 왠지 그 장면들을 보며 창피해져버렸다. 


그들의 양육법이 잘못되었거나 미숙해서라기보다, 그냥 내 치부를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지독하게 한국적인 양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저 땅이 미국이라는 점에서 이유 모를 창피함이 솟아났을 수도 있다. 잘 살아보기 위해 한국을 떠났는데, 한국의 모든 것을 그대로 들고 가서 한국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감히 내가 뭐라고,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까워서,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저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삶의 무게와 모든 계기들이 장면마다 짙게 묻어있었다. 


온통 적나라하고 지독한 현실 뿐인 영화 속에서 윤여정 배우가 연기한 할머니의 존재는 관객에게 처음으로 웃음을 주며 현실의 늪에서 잠시나마 발을 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데이빗이 할머니에게 가장 많이 하는 대사처럼, 윤여정이 연기한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가 않았다.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가 않아요." 


가끔은 모니카와 제이콥의 딸보다도 철도 없고 책임감도 없어 보였던 할머니는 시종일관 아이처럼 굴며 마운티듀나 찾아대고, 손자를 다치게 둔다. 할머니 답지 않은 할머니의 모습에 가끔 혀를 차다가도 할머니의 그 대책 없는 애물단지 같은 모습이 어이 없으면서도 귀여워서 너털웃음을 자주 지었다. 그러다 할머니는 별안간 늙어버리고 만다. 철 없던 할머니의 정신은 신체에 갇혀 그 어떤 일도 젊은 사람처럼 해낼 수 없어진다. 힘없이 늙어버린 할머니는, 무엇이라도 해서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지 하루 종일 혼자 바쁘게 일한다. 그제야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 우리가 아는 '한국 할머니' 같았다. 윤여정이 연기하는 할머니가 슬퍼지기 시작했던 순간이었다.


가족이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된 계기는 결코 가족구성원으로서의 할머니가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돈을 주고 베이비시터를 고용할 여유가 없어 돈을 받지 않고도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인력이 필요했던 것에 가깝다. 쓸모가 없으면 버려진다는 제이콥의 말처럼, 한국의 많은 할머니들은 가족에게 버려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해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가족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 종종거리던 할머니는 영화의 가장 큰 위기를 자초한다. 무너지던 할머니와 함께 내 억장도 함께 무너졌다. 할머니가 지금 느낄 당혹스러움, 무력감, 자신에 대한 원망 같은 감정들이 산만한 파도가 되어 덮쳤다. 그때 할머니가 택한 길은 내가 아는 가장 '할머니스러운' 선택이었다. 그게 나를 가장 사무치게 했다.


고난의 밤을 가까스로 무사히 보낸 후의 아침. 모두 피곤에 젖어 단잠을 취하고 있을 때 할머니는 할머니답게 이른 새벽 눈을 뜬 채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다. 윤여정은 그 눈빛 하나로 관객이 참아온 혹은 참고 있는지도 모른 채 쌓였던 눈물을 쏟아지게 만들었다. 윤여정의 연기는 영화 내내 빛나지만, 그 장면이 그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를 수 있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윤여정의 표정에선 수천수만 가지 감정이 읽혔다. 그 중 가장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던 감정은 후회, 회한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족의 모든 것을 앗아간 것처럼 보였던 할머니의 실수가 그 가족을 구원했다고 믿는다. 그 사고를 수습하던 과정에서 모니카와 제이콥이 택한 것은 서로였고, 그 선택은 사고가 있기 전까지 최고조에 치달아 있었던 두 사람의 갈등을 진화했다. 늘 할머니는 할머니 같지 않다며 밀어내던 데이빗이 아픈 심장을 쥐고 달려 할머니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순간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실수에서 비롯된 사고는 커다란 상실과 결속을 동시에 불러왔다. '이 패밀리'는 그 상실을 통해 결속했다. 덕분에 헤어진 채 각자의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상실을 극복하는 것을 택한 가족에겐 할머니가 심어둔 미나리가 있었다. 큰 돈과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건강히 잘 자란 미나리는 무성하게 펼쳐진 채 푸른 생명력을 뽐냈다. 가족은 그 생명력에 기대 살아갈 것이었다. 


그것이 이 영화가 준 가장 크고 유일한 위안이었다. 가족끼리는 서로 쓸모를 입증하지 않아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서로는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가 그렇게 외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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