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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 Mar 02. 2021

[OB'sDiary] 덕질, 빛을 탐하는 일

나도 내가 덕질을 왜 계속하는지 궁금해서 써본 글

나에게 덕질이란 무엇일까. 덕질이라고 불릴 만한 생활을 시작한지 어느덧 18년 째. 많은 것이 멈추거나 느리게 흐르고 있는 지금 괜시리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덕질이 나에게 남긴 것들을 되짚어본다.


나는 17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덕질을 했다. 18년째 꾸준히 좋아하고 있는 사람, 스치듯 좋아한 사람, 어느덧 10년이 넘게 좋아하고 있는 사람, 최근에 새롭게 알고 좋아하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을 다양한 기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좋아했다.


흔히 덕후에겐 덕후DNA가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덕질을 하는 사람은 꾸준히 덕질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웬만한 자극에는 끄떡도 없이 '머글'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 사실이다. 덕질을 오래 하다 보니 낯선 사람이라도 몇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느낌이 온다. 이 사람은 누군가의 덕후인지 아닌지. 혹은 덕후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까지도. 그럴 때면 또 궁금해진다. 나는 왜 그 '머글'들과 다를까. 나는 왜 이렇게 꾸준히 덕질을 하고 있을까.


고등학교 3학년, 대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쓰던 날이었다. 자기소개서 양식엔 존경하는 인물을 적는 칸이 있었다. 그 칸에 적혀야 할 인물들은 뻔했다. 유명한 위인 혹은 그 당시 내가 좋아했던 작가 같은 평범하고 흔한 답변을 써야 하는 칸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적고 싶은 사람을 적어버렸고, 결국 선생님께 퇴짜를 맞았다. 그때 좋아하던 아이돌그룹을 적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충분히 존경할 수 있겠지만 여기엔 네 진로와 관련된 사람을 적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결국 존경하는 인물에 누굴 적어서 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예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을 적어서 내진 않았지만, 지금은 존경하지 않는 사람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때 그 아이돌그룹을 적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내게는 당연한 결정이었고, 나는 지금도 그 그룹의 한 사람을 좋아하며 존경하고 있다.


그전까지, 나에겐 '덕후'로서 좋아하는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 시절에는 연예인, 특히 남자 연예인을 좋아하는 여학생들을 '빠순이'라고 불렀다. 나중에야 그 용어를 덕후들도 스스로 자신을 자칭하는 자조 섞인 표현으로 쓰긴 했지만, 분명 그 호칭은 명백한 비하와 조롱으로 만들어진 호칭이었다. 세상 모두가 멸시하는 듯한 그 '빠순이'가 되고 싶지 않았던 나였기에 친구가 아무리 옆에서 그들의 소식을 떠먹여줘도 궁금하지 않은 척, 좋아하지 않은 척 하며 밀어냈다. 그러나 이렇게 매일 생각나고 매일 찾아보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는데 그 마음을 무시하는 것도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깨끗이 인정하고 좋아하기 시작하니, 덕질은 내가 덕후가 아닐 때 짐작하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내 일상을 장악해갔다.



매일이 새로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찼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과 매일 새로운 이야깃거리와 문화를 만들고 즐기는 일은 그때까지 내가 겪어본 다른 어떤 일들보다 신나고 행복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처음엔 외모와 소속사의 트레이닝과 프로듀싱으로 만들어진 노래와 퍼포먼스로 데뷔해 인기를 얻었지만, 점차 자신이 가진 고유의 성격과 매력을 통해 스스로를 알리고 성장시키는 멤버들이 사랑스러웠다.


해를 거듭할수록 많아지는 팬들의 사랑을 쑥쑥 먹고 자라 더 넓은 세계로, 더 높은 곳으로 자신감 있게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 당시의 내겐 가장 큰 자극이고 꿈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어른이 되어갔고, 마냥 어리기만 했던 나에겐 까마득하게 오빠 같은 그들이 나보다 먼저 사회에 나가 프로로서 세상을 살아내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멋져보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아이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그들이 일을 하는 태도, 삶을 바라보는 자세, 가치관 등 모든 것이 내게는 이정표와 같았다. 그들처럼 살면 어떤 일을 하든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내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데 나를 그토록 자랑스럽게 하는 그들을 나는 언젠가부터 존경하고 있었다.


동경할 수는 있을지라도 존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연예인을 존경하기 시작한 것. 그것이 내가 오랫동안 덕질을 해온 이유였다. 1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덕질을 한 내게 남은 것은 내가 존경할 수 있었던 이들의 화려하고 복잡한 인생에서 배운 삶의 지침들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내면을 키운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과 용기이기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하고 정진하여 자신의 업계와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프로로서의 바람직한 태도, 인생선배로서 나보다 먼저 체득한 지혜, 교훈 등이기도 하다.


말을 예쁘게 한다는 칭찬을 듣는 그를 보며 나도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처음으로 어떻게 말 하는 것이 예쁘게 말을 하는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투박하고 무뚝뚝했던 내 말투와 내가 사용하던 단어들을 하나둘씩 고쳐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팬에게 전하는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들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나를 '사랑 받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기 시작했을 때부터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길을 걷다 웃음이 나고, 바쁜 와중에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느껴지면 멈춰서서 순간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그러다 이 따뜻한 빛이 그에게도 닿길 바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도 배웠다. 모두 익히 들어 알고는 있는 것들이었지만 내가 마음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감각으로까지 자극을 받아가며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추상적이기만 했던 감정들을 직접 만져보며 알아가는 것은 그저 알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물론 모든 순간이 아름답지도 않았고, 내가 좋아한 사람들이 언제나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모습만을 보이지도 않았다. 끝내는 존경이 아닌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 준 이들 때문에 마치 이별을 하듯 커다란 상실과 공허에 갇혔던 적도 있다. 같은 팬들 중에는 '괜히 좋아했다'라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내겐 괜히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탈덕'보다 어려웠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좋아했다. 좋아한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순간 그들을 사랑해 온 내 인생이 부정 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내게 준 많은 것으로 채워진 내 인생이, 분명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이 그렇지 않은 순간보다 많았던 시간과 시절들에 모두 슬픔이 덧씌워질 것이었다.


도무지 그렇게 둘 수가 없었다. 탈덕은 탈덕이고, 그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모자라고 형편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그걸 몰랐던 걸 탓하고 싶진 않았다. 그가 보여준 좋은 모습이 가짜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사랑하고 열광했던 좋은 모습과 기억들은 내 마음 속 방에 잘 접어 넣어두고 새로운 방에 그 기억과 추억을 뛰어 넘는 아름다운 것들이 채워지길 바라기로 했다.  


또한 덕질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이나 접하게 된 작품 등은 내게 세상의 아름답고 밝은 면 만큼이나 깊은 어둠을 보여주기도 했다.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도, 권력을 지닌 자들이 세워 놓은 보이지 않는 벽이 얼마나 크고 견고한지도 알았다. 다양한 사람들의 추악한 면을 다채롭게 목격한 적도, 많은 사람이 모이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속시끄러운 일을 겪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 일들이 나를 무너뜨리고 망가지게 하기 전에 타산지석으로 삼으며 내면을 단단히 다질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먼저 사랑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두려워 숨기보다는 정의의 힘을 믿고 패기 넘치게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나보다 먼저 거친 세상에 나아가 어렵고 까다로운 일들을 겪어낸 자들의 용기를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는 그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혜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다 상처 받고, 어린 치기라고 짓밟힐 지언정 내 생각과 행동이 옳다는 믿음이 있어서 다 괜찮았다.




너는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너무나 흔해져버린 말이지만, 흔한 말에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흔한 말이라도 그 말을 쓸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니까.


멋지고 빛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고, 그 정의에 더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도 완벽히 알지 못했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도 없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덕질을 하기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좋은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은 길이 얼마나 멀지는 몰라도 말이다.



최근에 알게 된 한 사람은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보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잘 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차근차근 멋진 프로가 되었다.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는데 늘 고민한 끝에 결국 더 성장한다. 헛된 고민은 없었다. 꿈을 향한 열정과 욕심으로 알차게 채워온 시간 만큼 쌓인 실력으로 대중 앞에 나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늘 좋은 사람으로서 착하게 살아온 그에게 세상이 그동안 착하게 열심히 잘 살았다고 보상을 해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승승장구한다.


그를 보며 오랜만에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멋진 직업인이 되고 싶다는 꿈, 프로로서 잘 해내고 싶다는 열정을 일깨운다. 어떻게 하면 그처럼 내 일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지 매일 고민하며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질투가 날 만큼 부러우면서도,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그에게 감사하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 선한 영향력을 확장시켜가며 세상에 존재감을 드리워가는 모습이 무척 반갑다. 착하게 살면 호구 된다고, 적당히 약아서 이기적으로 굴 줄도 알아야 된다고 말하는 어른들 밑에서 자란 내가 또다시 선의 힘을 믿게 해주어 고맙다. 덕분에 세상은 조금이나마 더 따뜻하고 아름다워진다.



그래서 나의 덕질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어쩌겠는가. 덕후라서 서러울 때도 많지만, 덕후라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을.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을 마음껏 탐구하고 사랑하며 내게 빛을 더해가는 일이 더없이 즐겁다. 덕후의 심장을 뛰게 하는 모든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오늘도 덕질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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