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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다 Jun 17. 2022

맨정신으로 걷기

2022.06.17

요즘은 술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마신다. 거의 매일 먹던 예전과는 달리 많이 줄였다. 그리고 한 번 마시더라도 과음하지는 않는다. 행복하다. 술을 마실 때의 기쁨보다 그 후의 괴로움이나 피로감이 더 크게 다가오기 시작하니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는 간격이 멀어졌다. 다음날이 숙취나 피로로 의미없이 흘러가는 것이 싫으니 자제하게 됐다.

대신 저녁이면 1시간씩 걷는다.

그래도 최소 일주일에 세 번은 1시간정도 걷는 시간을 가지고 있으니 참 잘 한 일이다. 술에 취하는 강렬한 기쁨보다 처음엔 소소하게 느껴지지만 깊이가 남다른 걷는 기쁨에 빠져들었다.

새벽 2-3시가 되어야 잠드는 습관이 들어서 고쳐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늘 약간은 피곤한 상태로 하루를 보낸다. 신기하게도 걷다보면 피로감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져서 은근한 중독에 빠져 나는 뻔질나게 걸어다녔다.

전엔 일이 조금씩 바빠지면 우선순위를 일에 두고 그 유일한 우선순위인 일만 죽어라 했다. 하지만 죽을 정도는 당연히 아니었고, 그냥 두려움에 일을 붙들고 하루종일 질질 끄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걱정하며 뭐가 되었든 소소하게라도 걷자고 다짐했고 생각보다 아직 바쁜 시기는 오지 않았고 약간의 조마조마함을 가지고 계속 걷는 요즘이다. 바빠져도 걸을 작정이다.


1시간 걷기는 운동효과는 미미하다고 한다. 살이 빠지진 않는단 얘기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있다. 술 대신 걷기로 채워가는 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길은 산뜻하다. 점점 어둠에 잠기는 풍경 속에서 나무의 질감과 바람에 흔들리는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은 즐겁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광고 쪽 일을 하는 분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면 무조건 밖에 나가서 걷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그 정도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냥 별 생각 없이 걷는 시간이 좋다. 아, 그정도 까지는 아닐지라도, 걷다보면 예상에 없던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얼마전엔 비온 다음날 밤 걷다가 두꺼비를 두마리나 만났고 살면서 내 눈으로 두꺼비를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다 차 바퀴에 밟혀 죽은 두꺼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얼마전 푹 빠졌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개구리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나는 내게 있어 그와 가장 비슷한 기억인 초등학교 가는 길에 마주한 생명체 쥐를 떠올렸지만, 이제는 두꺼비를 떠올릴 것이다. 그 장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꺼비든 개구리든 본 것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보지 못한 것과 본 것의 간극은 엄청난 것이었다. 경험한 것은 몸과 마음에 강렬하게 새겨진다.  

요즘 잠이 오지 않는 것도 바빠질 일들이 버겁게 느껴져서 자꾸 유튜브를 보거나 다른데 정신을 팔다가 잠이 못드는 것도 있고, 쓸데없이 여러 생각이 많다고 느끼는데, 걷는 1시간은 무념무상으로 내 움직임에 몸과 정신을 맡길 수 있어서 좋다. 좀 걷다보니 요즘은 더 강도 높은 운동이 필요하다는 걸, 근력 운동도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다. 주변에서는 런데이 앱을 깔아서 뛰어보라고 하지만 아직 열어보기만 했고 시도해보진 못했다. 열었을 때 30분 뛰기 같은 항목 뒤로 [매일 즐겁게 걷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 걷기는 즐거운 거였어. 운동효과만 좀 미미할 뿐. 정신적으로는 효과가 큰.

어릴 때는 서른다섯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는데, 이만큼 살아 보니 사람은 고쳐쓰지 못한다고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게 사람 마음인 것 같다. 죽어도 매일매일 걷기를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할 것 같지 않던 내가 이렇게 걷고 있고, 술만 진탕 마시다 이러다 큰일나는 것 아닌가 싶던 내가 스스로 술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계속해서 체력이 넘쳐났을 어릴 적이었으면 더 빠르게 내 몸을 갉아먹도록 술을 마셨을 것이고, 늘 그렇듯 나를 혹사시켰을 것이다. 드디어 남들이 그러하듯 내일의 나를 생각해서 오늘 좀 자제하고 나를 아끼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올인해서 마구 달려들어 부족한 경험치를 노력으로 채워 완성했던 초보시절을 지나, 이제는 내 몸을 혹사시키지 않고 충분히 머리로 생각하고 정리한 후에 적재적소에 필요한 공력을 들여 일을 한다. 물론 여전히 변수를 무시할 수 없고, 노력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적어도 너무 심하게 헤매지 않고 잘 나아갈 수 있게 된 건 다 무시못할 경험치를 쌓은 덕분이다.

그래서 그 기력을 조금 떼어 내 몸을 걷게 하고 내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또 5년 후, 10년 후, 내 모습은 어떻게 변화해 있을지 궁금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술만 진탕 마실 때는 내 미래가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그 중독에서 조금 벗어나고 나니 내가 조금은 나를 통제하고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 기쁘다.

하루 일과에서 한 켠에는 꼭 내 육체와 정신 건강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두기를. 이제까지는 일이 바빠지면 일 외에 모든 걸 놓아버렸지만 이제부턴 그러지 않기를. 일도 누구보다 내 욕심껏 잘 하고, 내 스스로도 건강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내가 되기를.


(요즘 걷기까지는 괜찮은데, 진득하게 앉아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는지 자주 쓰지를 못하고 있다. 이 글도 너무 후루룩 써버려서 더 다듬고 고쳐보고 올려야 하는데 그냥 거칠게나마 지금의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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