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3
무기력에서 간신히 조금 헤어 나온 요즘이다.
일이 없이 한가롭던 시간이 이렇게 길었던 건 처음이다. 하지만 월급쟁이 직장인은 그렇듯 일이 없으면 불안하고, 일이 많으면 괴로워한다.
정말 1년에 일주일 휴가를 갈까 말까 하며 주말출근도 당연하던 시절을 지나 처음으로 긴 여유로운 시간을 지내보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싶지만 한편으론 다시금 일을 시작하려니 의욕 넘치는 게 아니라 살짝 무기력해서 당황했다.
그래도 다행히 무기력을 넘어 그래도 다시금 일에 집중하게 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내 무기력의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첫째, 독립하지 못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지만 거의 잠만 자러 들어가는 나는 오히려 요즘 한가한 시간을 반년 가까이 지내면서 독립을 더 절실히 느꼈다.
내가 조용히 있고 싶을 때 거실이나 안방 TV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오면 괴롭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보지만 청개구리인 나는 지금 귀를 막고 음악을 듣고 싶은 게 아닌데 하다가 그래도 긍정적으로 지금 음악을 들어보자 생각하려 애쓴다.
생활비를 드리고 밥도 집에서 거의 먹지 않지만 그래도 그 가끔 먹는 밥이 내겐 감사하면서도 부담이다. 저녁은 최대한 야근하다 대충 때우고 들어가거나 한다. 일찍 들어가면 분명 부리나케 밥상을 차려주실 게 뻔해서 최대한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밤늦게 들어간다. 그러다 보면 지친다. 바쁠 땐 정말로 야근하다 들어가니까 잘 몰랐는데, 한가한 상태에서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면 어째 지친 기분이 든다. 그나마 몇 개월 전 새 차를 뽑아서 좀 넓고 쾌적해진 내 차라는 공간이 생겼지만, 한적한 곳에 차를 몰고 가 세워두고 의자에 기대 있어도 마냥 편안한 휴식인 건 아니다. 그래서 아주 가끔 견디다 못해 일찍 집에 들어가면 밥 먹었냐는 질문에 먹었다고 대답한다. 안 먹었어도 무조건.
둘째, 술 때문에.
핑계 같지만 술을 자꾸 마시게 되는 것도 위의 첫 번째 이유 영향도 있는 것 같다. 밤에 시끄럽거나 내 뜻대로 통제가 안 되는 환경이 갑갑해서 술을 마시고 내 정신을 무디게 만들려고 하는. 그래 이건 좀 핑계가 많이 들어갔다.
술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한다는 것은 여러 책과 연구에서 보았다. 책을 사랑해 마지않는(그만큼 많이 읽진 못하지만) 나는 술의 문제, 금주도 책에서 해답을 찾으려 몇 가지 책을 찾아 읽었다. 당연히 인생에서 받아들여할 고난과 역경을 술에 취해 있으면 회피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런 고난들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하고 해결해나가려는 의지가 없게 된다는 것. 그리고 술을 마시면 마실 수록 취해있을 때의 그 업 된 기분과 반대로 맨 정신에서의 우울감이 더 심해져서 자꾸만 술을 찾게 된다는 것.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술 자체에 중독성이 있다는 것. 19세부터 술을 꾸준히 마시면 40세 정도에 와서 무기력이 올 수 있다는 어떤 글도 읽었다.
셋째, 돈 때문에.
나는 지독한 소비 요정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최근에서야 독립을 예전보다 더 절실하게 바라다보니 드디어 저축을 좀 만족할 만큼 실천하게 되었다. 이건 코로나 시기를 지낸 여파도 같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모든 소비를 줄이려다 보니 주말에 외출하지 않고 집에만 있게 되었다. 예전보다 밖에 나가는 게 지치고 귀찮기도 하고 나가면 모든 게 돈이니까. 그러다 보니 방에 들어가 누워 자꾸 유튜브만 보거나 sns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요즘에서야 시간이 아깝단 생각이 들어 밖으로 일단 나가지만. 어쩌면 평생을 소비를 낙으로 살아온 내가 갑자기 극단적으로 소비를 줄이니 무기력이 오는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내게 언젠가는 필요한 시기가 이제야 왔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소비가 나를 즐겁게 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일 특성상 스트레스를 풀어주려면 돈을 써야지, 삶을 다 바쳐 일하는데 이런 건 좀 사야지, 하는 생각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엔 죄책감 같은 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습관을 고치기란 너무나 어려웠고, 오히려 독립, 내 집 마련, 노후 걱정 같은 키워드들이 예전엔 좀 먼 걱정거리였다면 이제야 큰 걱정으로 다가와 절실해지면서 소비를 줄일 수 있었다. 이것도 얼마 안 되어서 아직 습관으로 자리했다고 말하기에도 부끄럽지만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다. 극단적으로는 뭘 엄청난 걸 사도 의미 없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고, 늘 마이너스 인생인 게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저축을 하니 내 삶은 단출해졌고 마음은 편안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화에 무기력해진 건 아닌지 생각이 들어 중간중간 소소한 내가 만족할 만한 보상을 무얼 해줘야 할까 고민이다. 사실 소비를 줄인 것도 줄인 거지만, 이직으로 소득이 올라서 저축이 가능해진 것도 있다. 한편으론 소득이 적던 지난날을 너무 자포자기하고 저축을 안 한 게 후회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때 이것저것 다 해봤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미련 없게 되었고 저축을 하려는 마음이 된 것 아닌가 해서 그리 심하게 후회스럽지는 않다.
일에 취해서 미래를 너무 생각 없이 미뤄두고 현재를 살기 급급했던 것 같다. 혼자 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혼자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대비는 미뤄두었다. 이제라도 하면 되지 하며 드디어 마음을 다잡은 요즘인데 무기력이라니. 어느 날 문득 나를 돌아보니 내가 너무 남들과 비교하고 있더라. 그렇다고 주변 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들과 돈 얘기를 깊게 하지는 않지만, 회사 동료나 친구가 가진 집(당연히 대출로 갚아나가는 것이지만), 나보다는 잘 모으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 그리고 온라인에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는 나보다 소득 많고 돈 많이 모은 사람들의 이야기, 경제 유튜버들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저축과 이 시기에 이만큼은 얼른 모았어야 한다는 공식 같은 것들. 물론 그런 걸로 동기부여는 너무나 되지만, 어쩌면 허상과도 같은 ‘평균’에 집작 하다 보니 내가 급 무기력해진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남들보다 늦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준이란 과연 누구에게 맞춘 기준일까? 기준이 있는 게 맞는 걸까? 나는 내 속도에 맞게, 내 상황에 집중해서 가야 하는 것인데 늦었다고 생각하고 조급해지니 체할 것 같은 기분과 중압감에 더 무기력해진 것 같다.
20대에는 너무 돈 생각을 안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 경험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세트디자이너로서 무조건 많은 경험이 나를 좋은 디자이너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꼭 그렇게 소비를 해야만 좋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닌데도 나는 집착했다. 물론 그 결과 여행 같은 좋은 경험도 남았고 텅 빈 통장도 남았다. 지금에 와서는 반대로 열심히 모으는 시기가 필요하고 그게 지금이라는 걸 나도 잘 안다. 소비하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안 하려 하니 무기력한 것이다. 돈이 들지 않는 선에서 경험을 쌓아나가도록 해봐야겠다.
넷째, 사람 때문에.
코로나로 다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의외로 그게 괜찮다는 생각이 들고 익숙해지고 보니 전엔 어떻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인간관계를 맺었는지 낯설어졌다. 낯선 사람은 무섭고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기저에 깔렸을 수도 있다. 내향인인데 외향적으로 낯선 다수와 어울리며 일해야 하는 드라마 현장에서 일하면서 지쳤을 수도 있다. 끊임없는 전화와 카톡 지옥이 싫은데 일로는 해야 했던 나는 습관적으로 아무 대화 없는 카톡을 몇 분마다 켜서 확인한다. 의식적으로 책을 읽어야지 하다가도 자꾸만 폰을 들여다본다. 집중을 길게 못하게 된 건 현대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겠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고 연결되고 싶어 한다. 앱으로 내 인생에 본 적 없는 이상한 사람을 접해서 힘들어 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싫어졌다. 내가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더군다나 인플루언서나 유튜버가 만연한 요즘 세상은 외모지상주의에 말 잘하는 사람이 돋보이니까 나는 외모를 더 가꾸거나 언변을 갈고닦아야 하는 걸까 하는 스트레스가 생겼다. 이것 또한 온라인으로만 세상을 접하며 오는 납작하고도 단편적인 판단일 수 있다. 아까 위에서 얘기한 돈 문제처럼. 하지만 혼자가 편하고 누군가와 교류가 없는 상태가 안락했다. 예전보다 더 강력하게. 그러면서도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김경일 교수님의 유튜브를 보다 보니 가장 좋은 건 느슨한 관계를 여럿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래 본 친구, 그래도 1년에 한두 번은 만나며 인연을 이어오는 친구들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 나는 이 정도로도 너무 좋은데 무언가 답답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풀이 너무 좁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만나는 게 필요한 시점일지도 모르겠다.
결론은 무기력에서 벗어나려면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을 맡길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것. 과거엔 그렇게 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무력해졌을까. 그래도 지금이라도 그 이유를 찾고 글로 정리해보니 좀 명료해진다. 일어나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조금 난다.
아까 유튜브 쇼츠에서 우연히 본 영상에서 심리학자가 하는 말이, 기분은 날씨와도 같아서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단다. 그러니 기분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라고 했다. 그래, 인생에 행복한 순간도, 우울한 날도, 이렇게 무기력한 날도 있는 거지. 대신 마냥 휩쓸려가지 말고 그 속에서 일어나 다른 새로운 행동을 해볼 계기로 삼고 움직여보자.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드디어 이렇게 생각하게 된 나를 기특하게 여기고 일단 뭐라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