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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다 Apr 28. 2022

아지트

요즘 집 근처 카페에 자주 간다. 창이 커서 채광이 좋고 bgm이 좋고 무엇보다 문화예술관련 책이 많이 있어서 좋다. 늘 내가 오늘 해야겠다 마음 먹은 것들(글쓰기, 책읽기)을 짊어지고 가지만, 늘 한 눈 팔기 일쑤다. 그 중 하나만 해도 다행이다.


오랜만에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봤다. 새삼 깨닫는 사실, 그림 그리는 것도 여유로워야 가능하다. 일고여덟살 남짓이던 어릴 적 하루종일 그림 그리던 때를 회상하면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 머리를 비추고 있다. 카페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그려본다. 종이에 직접 그릴 때처럼 손날에 볼펜이나 연필 때가 묻지 않아서 좋다. 디지털로 그리는 방식은 참 편리하지만 내가 아직 툴에 익숙치 않아서 한편 조금 낯설다. 무얼 그릴 지 몰라 카페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하다가, 자꾸만 사방으로 지나다니는 손님들을 괜히 의식하게 되길래 결국 마음대로 그렸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같은 반에 만화를 잘 그리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 애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린 나는 틱틱대고 도도하게 구는 게 멋있는 건 줄 알았다. 아무튼 그 아이는 매일 책상에 앉아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자기가 그린 만화를 내게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나에게 무언가 그려보라고도 했다. 나도 교과서에 낙서하고 미술시간에 그림 그리면 은근히 주목받는 애였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이유로 그 애는 날 좋아했던 것 같다. 가끔 다른 친구들도 내가 그리는 것을 구경했다. 하지만 지금보다 백배 천배 내성적이었던 나는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 땅으로 꺼져 어디로 숨어버리고 싶은 아이였다. 보다 지겨워서 자리를 뜨기를 속으로 빌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웃긴데, 그 애는 샤프로 그라데이션을 표현하는 걸 해보이더니 나보고도 해보라고 샤프를 건넸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샤프로 명암을 내봤지만 결과는 내가 봐도 별로였다. 혼자 어딘가 틀어박혀서 그렸으면 더 잘 그렸을텐데 싶었다.

누가 볼까 신경 쓰여서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팔꿈치로 아이패드를 가리며 지금도 여전하구나 싶다.

오랜만에 그리는 내 모습이 낯설다.


언젠가부터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염없이 그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어린 시절은 까마득하고, 무용한 것에 힘을 쏟지 않으려는 내가 있다. 그렇다기엔 의미없이 보는 유튜브나 인터넷 가십거리 읽기,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읽다가 시간가는 줄 모르는 걸 보면 선택적인 것 같다. 시대가 변했고, 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쓸데없는 일로 내게 치부되었다.

그래도 학생 때까진 그린다는 것이 내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읽기나 쓰기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고 나는 그리고 쓰고 싶어했다. 지금은 쓰고 싶어하는 욕구가 큰 것 같다. 가끔 예전처럼 그림 그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나는 사춘기였고, 서울로 막 올라와 작은 빌라에 구겨넣은 짐들과 함께 살게 된 우리 가족은 힘겨웠다. IMF로 우리 아빠 엄마에게는 암울하던 시기였다. 나는 그 암울함을 감지했으나 무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부모님을 신경쓰고 있다는 표현하고, 예쁨 받으려 발버둥치는 것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매사에 짜증이 많아진 예민한 사춘기였다. 어느날 펌프(추억의 펌프…)장에서 보자며 그 아이와 그의 친구가 나를 불러냈고, 그 애가 펌프를 잘 하는 모습을 뽐내는 것을 바라봤다. 몇 곡의 노래가 지나갔고, 나는 그 길로 집에 간다며 먼저 걸어나왔다. 따라 나오는 둘을 남겨두고 나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 땐 왜 그렇게 긴 바지가 유행이었는지, 나름 가진 옷 중에 멋져보이는 짧은 반팔티와 허리가 자꾸 내려가 추켜 올려야 하는,  바닥을 다 쓸어버릴 듯한 바짓단을 질질 끌며 집에 돌아왔고, 엄마에게 쓰는 메모장에 글을 남겼다. (나와 동생이 잘 때 엄마, 아빠가 오실 때가 많았기에 펜팔을 주고 받듯 수첩을 유선전화기 옆에 두고 나는 자주 엄마에게 편지를 썼고, 엄마도 답장을 쓰곤 했다.)

‘엄마, 나 좋다고 하는 남자아이가 있는데 노는 거 바라보다가 집에 왔어요. 라고.’ 그 땐 그게 잘 한 일인 줄 알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냥 같이 재밌게 놀 걸 싶다. 어린 나는 어딘가 삐딱했고 음울했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우울은 내 타고난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냥 그 시기가 내겐 어렴풋한 우울 그 자체였다. 부모님에게 직면해서 나에게까지 뿌옇게 영향을 미치는 안개같은 것,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슬픔이었다. 지방을 여러번 이사 다녀 새로운 환경에도 언젠간 적응한다고 어린 나는 체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곳은 낯설었고, 늘 빛이 잘 드는 쾌적한 아파트에서 나만의 방을 가지고 지내다가 처음 겪는 서울의 어두침침하고 좁은 빌라 생활은 그런 우울함을 더했다.


빌라 옆 동에 좁은 틈새로 들어가면 삼각형 모양의 작은 시멘트 바닥이 있었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그 공간에 자주 갔다. 열쇠를 두고 온 날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가족 중 누군가 올 때까지 잠긴 문 앞에서 기다렸다. 현관문 앞 계단에 앉아 책을 읽다가 그래도 지치면 혼자라도 그 삼각형 공간에 갔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곳을 아지트라고 불렀다. 사람 한 세 명이 들어서면 꽉 찰 것 같은 공간에 하릴없이 왜 자꾸 갔을까. 좁아진 집 안에서 더이상 어디로 숨어들 수 없었기에, 나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현실의 나는 잊고 이야기 속 세계로 빠져들 듯이. 도피하듯이. 현실의 내가 숨고 싶을 때 그 곳에 갔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며 그 때 그 아이는 뭘 할까, 정말 만화가가 됐을까 생각한다.


그 때 내게 그리기나 쓰기, 읽기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현실에 치인 지금의 나는 도피처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과거의 나보다 훨씬 자리잡고 일적으로는 쌓아나가고 있는지 몰라도, 내 안의 나는 자주 길을 잃고 넘어진다.


요즘 일이 잠시 여유가 생기니 예전보다는 자주 뭐라도 쓰고 있는데, 며칠 전부터는 쓰는 게 버거워졌다. 잘 정리되지 않고 써야한다는 생각으로 마음 한 켠이 무거웠다. 문득 내가 이걸 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돌아봤다. 자주 많이 쓰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사실이고, 어떤 의무감이나 습관으로 가져가지 않으면 계속 쓰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조금 뜸하더라도 나는 끊임없이 내 안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정리해 그리고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최대한 치유의 작업으로, 도피처로 삼고 싶다. 그 때 뛰어가 가만히 숨어있던 그 삼각형 아지트처럼, 그리고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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