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딸에 대하여』(2017)
한 여인이 있습니다. 딸이 한 명 있다고 하니 일단 이 분을 '어머니'라고 부릅시다.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보호사로 일합니다. 직업에 걸맞게 봉사 정신도 남다르고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깊습니다. 아니, 보호사 중에서도 유독 이해심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피보호자 '젠'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데, '교수 부인'이라고 불리는 동료 보호사는 환자에게 그렇게까지는 마음을 쓰지 않으니까요.
어머니의 집에 딸이 들어옵니다. 잠시 들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이사를 오겠다고 하네요. 그런데 혼자 오지 않습니다. 옆에는 '레인'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레인'은 딸을 '그린'이라고 부릅니다. 어머니는 자신도, 남편도 붙인 적이 없는 이름으로 딸을 부르는 레인이 달갑지 않은 모양입니다.
『딸에 대하여』는 이미 큰 화제가 된 작품입니다. 레즈비언 딸과 그 파트너와 한 집에 살게 된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완성도 있는 퀴어 문학이 한국 문단에도 등장했다는 사실은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딸에 대하여』를 조금 다른 방향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퀴어 문학으로서 『딸에 대하여』가 지니는 의미는 이미 훌륭한 글이 많으니 그쪽을 참고하시는 편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딸에 대하여』의 어머니는 레인과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힘겨워합니다. 미묘한 감정(아마도 불쾌감)을 겨우 억누르고 있다가도 딸이 레인의 어깨에 손을 두르자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어머니는 딸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상적인 삶일까요? 적어도 어머니는 '말썽 피우지 말고 얌전히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딸은 언제나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아프리카 봉사를 간다며 어머니를 놀라게 하고, 가출을 해서는 멋대로 독립을 해버립니다. 어머니는 딸이 어서 안정된 직장을 얻기를 바라지만, 딸은 학교의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려고 합니다. 딸의 '비정상적인' 사랑도 이러한 문제들과 결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얌전하게, '정상적으로' 살면 좋을 텐데 딸은 정반대로만 행동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딸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소리친다고 누가 들어줄 것 같으냐고요.
어머니는 딸의 행동을 젊은 날의 치기로 생각합니다. 딸이 아프리카로 훌쩍 봉사를 가거나 갑자기 독립한 일도 딸이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몰랐기에 저지를 수 있었다는 투로 어머니는 회상합니다. 하지만 딸이 아프리카 봉사를 후회하지도 않았고, 독립을 시도했다가 슬그머니 돌아온 적은 없다는 사실은 외면하죠. 딸이 성인이 된 후에 실행한 일은 모두 주체적으로 철저히 고민하고 결정한 일입니다. 따라서 딸이 성 정체성을 깨달은 일도, 학교와 맞서는 일도 결코 치기 어린, 낭만적 행동이 아닙니다. 모두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고 그 길을 걸으리라 결심한 것이죠.
그런데 어머니는 이미 딸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품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피보호자 젠에게 동정심을 느낍니다. 한때 유명한 사회 운동가였지만 이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젠을 위해 어머니는 요양원 규칙을 어기고, 의사와 논쟁합니다. 끝내 다른 요양원으로 쫓겨난 젠을 어머니는 기어코 찾아내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하죠. 어머니의 행동은 어떤 면에서는 딸 못지않게 낭만적이고 치기 어린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어머니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한 일입니다. 어머니는 딸을 비난했지만, 자신도 결국 딸과 다름없는 행동을 한 것이죠.
두 사람이 닮아 있다는 점은 두 사람의 행동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그러한 행동을 한 이유도 비슷합니다. 딸이 학교에 맞서 싸우는 것은, 학교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동료 강사를 해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동료 강사가 받은 해고 통지서는 언젠가 딸도 받을 수 있는 통지서였습니다. 딸이 학교에 맞선 것은 단순히 치기 어린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운명 공동체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는 어떤가요? 어머니는 젠에게서 외롭게 죽어가는 노인의 모습을 봅니다. 그 모습은 언젠가 어머니 자신이 맞이할지도 모르는 비극이었죠. 어머니가 그토록 적극적으로 젠을 돌보고 구조한 일은 결국 죽음을 앞둔 운명 공동체로서 사명을 다한 일인 셈입니다.
딸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품고 있으면서도 어머니는 딸을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딸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한 계기는 딸이 참가한 시위 현장을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그 아수라장을 겪고서야 어머니는 딸의 저항이 정체성, 생존권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직감하죠. 그리고 딸의 정체성은 인간의 삶과 죽음처럼 결코 포기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습니다.
『딸에 대하여』의 결말부는 새로운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가족'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요. 하나는 젠, 어머니, 딸, 레인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 한 가족이었지만 잠시 소원해졌던 어머니와 딸은 다시 가족으로 결합하고, 젠과 레인이 새로운 구성원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가족은 이전에 없었던 가족이기도 합니다. 젠과 레인은 모녀와 혈연관계가 아닙니다. 딸과 레인은 전통적인 가족 개념으로는 결코 가족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이죠. 그럼에도 네 사람은 이러한 구성으로도 얼마든지 가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봉합일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직 딸과 레인의 관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젠을 돌보는 일로 잠시 그에 대한 고민을 제쳐두었을 뿐입니다. 젠이 죽은 지금, 어머니는 다시 한번 딸과 레인을 정면에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네 사람이 이룬 새로운 가족에서 가장 보수적인 인물은 여전히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를 제외한 세 사람은 기존에 주어진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쓴다는 점, 세 사람은 이미 '새로운 가족'을 경험했다는 점(딸과 레인은 동성애 관계로, 젠은 1인 가구로)은 가장 변화해야 할 인물은 결국 어머니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어머니가 과연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으로 온전히 거듭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을 잡아 보자면, 어머니가 이제는 딸과 레인의 관계가 낯설다는 점을 솔직하게,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짚어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