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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빈 Sep 08. 2018

엄마와 복숭아

애증관계에 있는 대부분의 모녀가 그러하듯, 포르투갈을 함께 여행했던 남자이자 이제 남편이 된 그와 함께 살게 되니 엄마와의 관계는 나아졌다. (사이가 좋아졌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25년동안 살던 동네를 처음으로 떠나왔다. 신랑은 "넌 결혼한 것보다 엄마한테서 독립한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부모는 선택할 수 없지만 배우자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 예전부터 '나와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엄선해 실제로도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몇달 되지 않은 아직까지는 꽤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밤 늦게 친정 동네에서 약속이 있고 다음날 머리를 해야해서 친정에 하루 머물렀다. 집 앞 포차에서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데 새벽 한시가 넘자 집에 오라는 엄마의 전화가 몇번이고 이어졌다. "아니 신랑도 가만히 있는데 엄마가 왜 난리야." 오랜만에 듣는 잔소리에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자 친구들이 '갑분싸'하게 만든다고 핀잔을 줬다. 집에 돌아와서는 딱딱한 돌침대 대신 푹신하고 넓고 남편이 있는 우리 집 침대가 생각나는 밤이었다.

다음날 엄마와 오랜만에 성당에 함께 갔다 돌아오며 장을 봤다. "복숭아 사먹어야지.  이제 내년까지 못먹잖아. 부지런히 밥 대신 복숭아 먹을거야." "사줄까?" 엄마가 물었다. "갖고 가기 무겁잖아. 동네 가서 사먹지 뭐." "집에 복숭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있다가 집에 가서 찾아보고 깎아줄게."

집에 와서 냉장고를 뒤적이던 엄마는 복숭아가 아니라 천혜향만 잔뜩 있다며 껍질을 벗겨줬다. 나는 두어 조각 대충 먹었다. 밥 먹고 한동안 수다를 떨다가 미용실로 향했다. 머리는 금방 잘랐다. 지하철을 타고 우리 집까지 먼 여정을 떠났다. 중간쯤 왔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좋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다.

"머리 다 잘랐어?"

"응. 아까 끝났지. 지금 반도 더왔는데."

"아 그래? 벌써 거기까지 갔어?"

"응 왜?"

"아니, 냉장고 천혜향 있는 아래 칸에 복숭아가 잔뜩 있었는데 잊어먹었다. 선물 들어오너 좋은거 너 주면 온다고 아껴놨는데 아까 왜 윗칸만 보고 아래를 안봤는지. 어쩐지 복숭아가 분명히 있는것 같았는데 없더라고. 밑에를 열어볼 걸 그랬어."

"아 완전 먹고 싶었는데. 아깝다."

"그래서 너 어딘가 해서 전화했지. 집에 들러서 먹고 가라."

"언제 거길 또 가 ㅋㅋㅋ 엄마 먹어."

"나 당땜에 과일 잘 안먹잖아. 다니엘이나 줘야겠다 아들 안챙기고 딸 줄랬더니 아들도 주라고 까먹었는가보다." 친구들한테 '엄마랑 떨어져 사니 세상 편하고 좋다'고 자랑자랑을 한게 못된 딸년 인증만 한 것 같아서 뜨끔했다.

집에 오는 길에 남편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복숭아 맛있어 보이길래 사줄까 했는데 너가 장모님이랑 너무 재밌게 노느라 전화 안 받는 것 같아서 얄미워서 안샀어." "뭐야. 뭘 물어보고 사 그냥 사주면 되지!" "안 사줄거야." "내가 사먹을 거야." 집 근처 과일가게는 일요일이라고 문을 닫았다. 다음날 신랑은 말 없이 복숭아 한박스 사진을 보냈다. 정말 밥 대신 부지런히 복숭아만 먹어야할 만큼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말랑말랑하고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백도였다. "매일매일 먹는지 안먹는지 확인할거야." 올해 먹은 복숭아 중에 가장 맛있었다. 안 먹어 본 엄마의 복숭아 보다 더 맛있을 거라고. 내년 여름이 올때까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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