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때는 '받아쓰기' 외에는 시험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 2학년이 되고 나서는 국어와 수학의 단원이 끝나면, '단원 평가'를 시작한다. 본격적인 "비교네이션"으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초등학교 수학 시험이 뭐라고...
'단평(단원평가)'이 있는 날 오후가 되면, 담임 선생님이 커뮤니티 앱을 통해 '단원 평가의 평균 점수'를 알려주신다. - 나는 그 모습이 "쇼미 더 머니(Show Me The Money)"의 프로듀서가 지원자들을 향해 점수를 발표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점수 발표 직전의 불안한 지원자들의 동공이나, 어머니들의 긴장된 모습까지 말이다.
이번 수학 단원 평가 평균은 90점입니다.
세상에나 90점이라고? 무슨 초등학교 2학년들이 이렇게나 시험을 잘 보는 것인가. 90점이면 최우수 아닌가?? 선행학습을 우주에서 가장 싫어했던 아빠를 둔 덕에, 7살 유치원 여름방학 이후부터 한글을 시작했고, 일체의 선행학습 없이 (아, 영어는 부인님의 논리에 내가 밀렸다...) 학교를 다닌 우리 첫째다.
오늘도 어김없이 엄마에게 혼나고 있는 첫째를 보니 마음이 안쓰럽다. 하지만 다행히도 첫째는 해맑게 응수한다. "아빠~ 그래도 나 공부한 것보다는 잘 나온 거 같아!"
돌이켜보면 나는 초등(사실은 국민) 학교 2학년 때 내가 "4반"이었다는 것과 "짝사랑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나지, 수학(당시에는 산수)을 배웠던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그래그래, 건강하면 되지, 무슨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냐?"
물론 그 순간 "여보, 요즘엔 다르다구요~~~"라며 부인님께서 찌릿한 눈빛을 쏴주신다.
회사에서는 말입니다.
올해로 입사 15년 차가 되었다. 매년 '팀의 캡틴을 담당'하는 팀장님께 두 자리 알파벳(마치 학점과 같은)으로 된 평가를 받았다. '피드백 사우의 올해 1) 성과는 몇 점이며, 가지고 있는 2) 역량은 몇 점입니다.'라는 성적표를 1년마다 한 장씩 받게 되는 셈이다.
이 두 자리 알파벳이 직장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꽤 큰데, 이를테면 내년에 내가 받을 총 급여 금액의 퀄리티를 바꾼다거나, 또는 해당 직급(사원, 대리, 과장, 차장...)에서 이 알파벳으로 쌓인 점수의 총합을 통해 승진 여부가 결정되기도 한다.
평가가 끝나고 나면, '성적표'를 받아본 이들은 한층 얼굴이 밝아지기도 하고, 말이 없어지는 이들도 있다. 메신저는 삼삼오오 벙개를 치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가고, 분노와 슬픔을 술로 달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이는 내년에 어느 팀으로 옮길지를 상의하러 다니기도 한다. 그 팀에 있는 일명 '똥차'(해당 직급에서 진급이 오랫동안 밀려있는 분들을 칭하는 말)가 너무 많아서 앞이 보이 않기 때문이란다.
이제 슬슬 평가의 시즌이 돌아오고 있어, 곧 내 눈앞에서 볼 풍경들이다.
무엇이 더 공정한가요?
첫째가 채점된 시험지를 가지고 왔다. 틀린 부분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는 엄마의 명령이었지만, 그 시험지를 보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초등학교 시험은 공정하구나.
물론 선행학습이나, 사교육에 맡긴 돈과 시간, 부모들이 힘써 시켜주는 여러 가지 체험의 결과도 시험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맞지만, 시험과 점수가 나오는 과정 자체는 공정 그 자체이다. '같은 문제'를 주고 '같은 시간' 동안 시험을 봐서 맞는 점수가 아니던가.
그런데 회사는 다르다.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회사 멤버들 중에 "빛의 자식들"이 있는데, 세상 스마트하고 일 처리에 능숙하며 중추적인 일들은 모두 도맡아서 하고 배울 점이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회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히 "평가"에 있어서는 "어둠"에 가깝다. (나 역시 평가에 있어서는 어둠과 같다. 하아..)
부서 성격에 따라, 묵묵히 일을 해내가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는 곳도 있지만, 일만으로 평가를 잘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 외에도 평가를 받는 항목은 수십 가지가 넘는 곳이 회사이다. 물론 그 평가 뒤에는 고정비라는 무시무시한 항목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끔 말도 되지 않는 사유로 평가를 잘 받거나 승진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 급 허탈해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첫째가 부러워진다. 곧 다가올 평가 시즌에 '엄마에게 혼나고도 해맑은 첫째'처럼, 나 역시 멘탈 털리지 않게끔 정신 꽉 잡고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