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갇힌 아이들에게
열등감은 자기를 신체적·심리적·사회적, 또는 그 밖의 상태나 조건이 다른 사람보다 약하거나 낮거나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감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던 어린 시절이 지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타인과의 비교에 본격적으로 눈을 뜹니다. 이런 비교 의식은 신체가 급격히 변화하고 성적이 등수로 평가되는 청소년기에 절정을 찍습니다. 특히 외모가 경쟁력이라 일컬어지고 어릴 때부터 입시경쟁에 내몰리는 요즘, 열등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중학생이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떤 열등감을 느끼고 있을까요?
남자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가 되면 ‘짱’이 드러납니다. 크고 작은 다툼들이 조금씩 쌓이다가 어느새 암묵적으로 ‘제일 싸움 잘하는 애’가 정해집니다.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면 이 또한 자연스러운, 그 나이 대의 특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체구는 아주 작은데 ‘짱’인 강현이가 있었습니다. 5학년 때 이미 6학년 형과도 한판 붙은 적이 있는 강현이는 날쌔고 재빨라서 거의 모든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리더십도 있어서 같이 어울리는 무리들도 꽤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잘 다독거려주는 선생님들과 좋은 학교 분위기 덕분에 ‘성격 있는 녀석’ 정도로 알려지며 큰 사고 없이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강현이가 변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습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담임선생님이 전체적인 반 분위기를 주도하고 아이들을 챙기던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많으면 네 번 정도 만나는 과목 담당 선생님들은 교실에 드나드는 외부인 같은 느낌입니다. 조회, 종례, 하루에 두 번 더 만나는 담임선생님도 학급 분위기를 전적으로 좌지우지하지 못합니다. 거기에 ‘학습’ 위주의 중학교 분위기에 적응 못하는 아이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일으키는 사고도 초등학교 때와는 수준이 달라집니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신체적으로 가장 많이 변화하는 시기가 중학교 시절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매우 작은 정도’였던 강현이는 다른 아이들이 쑥쑥 자라나는 동안에도 별로 키가 크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키 차이가 커지면 커질수록 아이는 거칠어졌습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에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담배’로 열리기 시작한 <학교폭력위원회>는 이후 ‘폭행’으로 이어졌습니다. ‘문제아’로 낙인찍히는 것은 금방입니다. 한번 ‘문제아’가 된 아이는 그런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제가 부모모임에서 만났던 강현이의 엄마는 유난히도 키가 작았습니다. 자기 모습이 이래도 결혼 전에 직장생활도 잘했고 놀기도 잘 놀았다며 활짝 웃는 강현이 엄마의 첫 모습은 활기차보였습니다. 그러나 만남이 깊어갈수록 강현이 엄마의 씩씩함 속에 숨어있는 아픔이 조금씩 느껴졌습니다. 강현이 엄마는 중학생이 된 강현이가 점차 입을 닫고 좋아하던 체육조차 싫어하게 된 것이 모두 자기 때문이라고 슬퍼했습니다. 그 후 저는 학교폭력 피해자 부모와의 면담에서 한 번만 봐 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엄마 옆에서 정작 사고를 친 강현이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에 빠져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아이는 강현이만이 아닙니다. 성장판 검사와 키 크는 약에 얽힌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롭지 않고 성형수술 시켜달라고 단식투쟁을 하는 여중생 이야기도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스스로를 뚱뚱하다고 생각해서 다이어트를 하는 중학생도 많습니다.
중학교 올라가기가 너무 무섭다는 현지가 있었습니다. 많은 6학년 아이들이 중학교 진학에 대해 걱정하지만 현지의 두려움은 유난히 심했습니다. 유머감각도 있고 친구관계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기에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의 이유가 매우 궁금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미 중학생인 언니가 공부를 아주 잘했습니다. 언니와 현지가 다니는 학원건물의 외벽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는데, 언니는 항상 거기 이름이 올라있는 모범생이었습니다. “OO중학교 2학년 강현O, 기말고사 평균 98점/전교 2등”,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학교 숙제는 쉬는 시간에 친구 걸 보고 하더라도, 학원 숙제는 밤늦게라도 꼭 해가야 해요.”
현지는 자신도 중학교에 가면 현수막에 이름이 올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부모님의 기대도 부담스럽다고 합니다. 언니와 비교하면 자신은 잘하는 것이 없는 것 같고 중학생이 되어 성적표를 받을 것이 너무 무섭다고 합니다. 형제자매는 부모가 드러내놓고 비교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비교와 경쟁의 대상입니다. 현지의 경우처럼 한쪽이 특별하게 공부를 잘하고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만약 부모가 아이를 자극한다는 명목으로 드러내놓고 형제자매를 비교하고 경쟁을 부추긴다면 당장의 동기부여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들 사이에는 우애가 대신 열등감과 우월감이 자리할 것입니다.
소설 <완득이>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가시 하나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딱 10센티만 더 컸으면…’이 한이 된 키 작은 ‘어른’입니다. 밥이라도 맘 편히 먹고 싶어서 못사는 나라에서 시집온 어머니는 주민등록증까지 나왔지만 여전히 ‘저짝’에서 온 이방인입니다. 멀쩡한 외모에 어린아이 지능을 가진 삼촌은 우연히 만나 가족이 된 난쟁이 형님 말고는 세상 어른들이 모두 무섭습니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 때문에 무시당하고 상처받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완득이는 세상과 벽을 치고 숨어살았습니다.
완득이와 아버지, 그리고 강현이와 현지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은 완득이 아버지처럼 겉모습이 세상기준에 많이 부족한 사람이나 완득이처럼 가정 환경이 두드러지게 나쁜 사람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대로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키에 대한 열등감, 외모에 대한 열등감, 집안 환경에 대한 열등감, 성적에 대한 열등감, 사회성 부족에 대한 열등감, 목소리에 대한 열등감, 싸움 못하는 것에 대한 열등감, 단짝 친구에 대한 열등감, 형제자매에 대한 열등감, 부모에 대한 열등감,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열등감 등등, 열등감을 느끼는 부분도 다양하고 열등감을 느끼는 대상도 각양각색입니다. 어쩌면 세상에 열등감 없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열등감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열등감 때문에 좌절하고 인생을 낭비하지만 누군가는 열등감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습니다. 이런 차이는 왜 나타날까요? 그리고 열등감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열등감 때문에 좌절하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삶의 원동력이 되는 열등감과 삶을 좌절시키는 열등콤플렉스가 어떻게 다른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들러에 따르면 열등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입니다.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런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 더 나아지길 바라는 보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욕구를 ‘우월성 추구’라고 하는데,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열등감입니다. 즉 자신의 이상과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바로 열등감입니다.
우월성 추구나 열등감은 그 자체로는 병이 아니며,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하기 위한 자극일 뿐입니다. 즉 열등감도 제대로만 발전하면 노력과 성장의 촉진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 하고 더 행복해지려고 하는 방향으로 열등감이 나아간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요. 열등감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한 걸음 내디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상황은 현실적인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노력도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어차피 나 같은 건”, “어차피 열심히 해봤자” 라며 지레 포기 합니다. 이것은 열등감이 아니라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 즉 열등콤플렉스입니다.
열등콤플렉스와 겉모양은 반대여도 뿌리는 같으며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우월콤플렉스입니다. 우월콤플렉스란 심한 열등감에 괴로워하면서도 노력과 성장 같은 건전한 수단을 이용해서 보완할 용기도 없고, 또 ‘못난 나’를 받아들이는 열등콤플렉스도 견뎌낼 수 없는 사람들이 마치 스스로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며 ‘거짓 우월성’에 빠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춘기 아이들에게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허세도 우월콤플렉스의 일종입니다. 자신이 연예인이나 일진 등 아이들 세계의 유명인과 친하다고 과시하거나 비싼 브랜드 옷이나 신발, 가방 등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 등, 모두 그렇습니다. 이러한 행동의 밑바닥에는 강렬한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을까봐 겁내는 두려움이 숨어있습니다.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의 차이를 이해한다면 사춘기 청소년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열등감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관점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열등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만 들여다보고 모든 실패의 원인을 부족한 부분 탓으로 돌립니다. 열등감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면 자기 자신과 세상이 모두 왜곡되어 보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도 있습니다. 잘하는 부분이 있고, 남들과 비슷한 부분이 있고, 남들보다 부족한 부분도 있는데, 열등감이 심한 경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것이 평생 변할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 고정화시킵니다. 부족한 일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코끼리 다리만을 만지고 코끼리를 두꺼운 기둥처럼 생겼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잘하는 부분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는 자기 자신을 전체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열등감이라는 색안경을 벗을 수 있습니다.
사춘기 청소년들이 쉽게 비교 대상으로 삼는 친구들도 남보다 부족하다 느끼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부러워하는 그 친구가 나의 다른 장점 때문에 나를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쉽게 ‘엄친아’라고 부르는 이들도 분명히 스스로에게 부족함을 느끼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잘하는 것과 부족한 것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인격체이며, 이런 장단점은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노력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도 있고,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열등감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열등감은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내가 도전해서 넘어가거나 때로는 받아들이며 성숙해 가도록 격려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심리학 용어에는 ‘재구조화(reframing)'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림을 넣는 틀이 바뀌면 그림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것이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단점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부분을 다르게 생각하면 단점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넌 왜 한 우물을 못 파니?”라는 말에 “난 여러 우물을 파는 걸 즐겨.”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다는 단점은 더 이상 단점이 아닙니다. (정헌재 카툰에세이집 <완두콩>에서 인용)
물론 청소년들이 스스로 이런 관점 전환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꾸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집착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보다 넓은 세상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열등감은 다른 사람 및 세상과 소통하지 않을 경우 쉽게 열등 콤플렉스로 변질됩니다. 만약 부모의 유전적인 부분이나 환경적 요인 때문에 자녀가 열등감에 시달린다 하더라도 부모가 죄책감이나 미안한 감정 때문에 자녀의 열등감을 안타까워해서만은 안 됩니다. 강현이 엄마의 경우, 강현이에게 미안한 마음은 안으로 잘 갈무리하고 키가 작더라도 씩씩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자녀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강현이 엄마는 자신의 키가 작은 것이 강현이에게 대물림된 것이 강현이 일탈의 원인이라고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현이 엄마 스스로 그 열등감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면 강현이 또한 계속해서 그 틀 안에서 힘들어할 것입니다. 키가 작은 것이 불편할 수도 있고 속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엄마 먼저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지금 강현이의 일탈도 언젠가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키가 작아도, 신체적 장애가 있어도, 조금 독특한 부분이 있어도, 세상에 이름을 남겼던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함께 기억했으면 합니다. 나폴레옹의 작은 키와 출신에 대한 열등감은 유명했지만 누구도 그를 우습게보지 못합니다. 찰리 채플린은 자기가 키가 작은 걸 아주 다행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자기처럼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거인들을 물리치니까 관객들이 시원해하는 거라고 말이지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어릴 때 앓았던 소아마비 때문에 보행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위대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서태지는 남보다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 때문에 열등감이 있었고, 첫 데뷔 무대에서 혹평을 받았지만 결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만약 중학교 졸업이란 학력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다시 진학을 결심하고 단계적으로 실천해서 대학을 갈 수도 있고, 박사 학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고등학교를 중퇴했지만 타고난 감각과 오랜 기간 실무에서 익힌 실력을 바탕으로 광고회사를 차리고 자신을 키워준 동네에 멋진 거리 미술관을 만든 박동훈 대표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박동훈 대표 같은 분은 이미 자신의 중학교 졸업 학력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노력이나 힘으로 개선이 불가능한 부분에서 열등감을 느낀다면 불가능한 것을 붙들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포기하고 받아들인 후 다른 것으로 보완할 수 있도록 계발해 나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런 부분(성별, 외모, 장애 등)이 열등감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차별을 바꾸는데 한 손 보태는 것도 멋진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열등감을 넘어서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소설 속에서 완득이는 다행히 두 명의 멘토를 만납니다. 숨어있던 완득이를 찾아내 도피처에서 끄집어낸 것은 똥주 담임선생님이었고,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새로운 별을 보여준 것이 체육관 관장님이었습니다. 이들을 만나면서 완득이는 아버지의 아픔과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키운 것도, 앞으로 자신을 키워갈 것도 열등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완득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꿈을 꾸기 시작했고 조폭 꿈나무에서 킥복싱 꿈나무로 성장해 나갑니다. 완득이의 열등감은 멘토와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켜 나갈 원동력으로 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해 자신의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동주 샘의 아버지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풍족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겠지만 타인의 눈물을 바탕으로 한, 아버지의 물질을 아들은 거부합니다. 수급품을 받아먹게 만들었어도 난쟁이 아버지의 늙은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아버지의 추진력과 결단력을 존경하는 완득이와 많이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부모가 평생 아이들의 지붕이 되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려움을 막아주고 더러운 것을 치워주고 힘든 일을 대신 해주고… 공부 못하는 싸움꾼과 사귀는 것을 막으러 완득이를 찾아왔던 윤하 어머니는 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왕따와 근거 없는 소문은 어머니의 힘으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윤하가 도망가지 않고 왕따와 정면으로 맞설 힘을 내게 된 것은 동주 샘과 완득이와 혁주 같은 친구들의 지지 때문이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결핍 자체를 없애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해줄 수 없는 것처럼 열등감이 전혀 없는 아이로 키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등감은 인간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자녀들이 열등감을 가지는 부분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격려하며 넓은 세상 속에서 좋은 멘토를 만나 더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습니다. 특히 사춘기 아이들은 넓은 세상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훌쩍 넓어진 시야 안에서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열등감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자기 안에 이미 기존의 열등감을 이겨낼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완득이만 담임선생님과 관장님을 통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담임선생님과 관장님도 완득이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17살 완득이와 친구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처럼 우리는 모두 만남을 통해 성장합니다. 이런 만남은 사람일수도 있고 책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삶을 바꿀 수도 있는 만남을 충분히 가질 수 있도록 늘 격려해주고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런 만남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삶에 여백을 허락해야 합니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열등감은 우리를 상처주기도 하고 키우기도 합니다. 조개가 이물질을 품고 진주를 만들어내듯이, 아픔이 성장을 만들어 냅니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 ‘이상적인 나’와의 비교에서 생기는 건전한 열등감을 바탕으로 지금의 나보다 앞서나가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가치있는 일일 것입니다. 앞서나간다는 것은 자신의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디디려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지, 남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려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늘 기억했으면 합니다.
열등감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한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 앨리너 루즈벨트 -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완득이> 김려령 / 창비 / 2008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알프레드 아들러/ 소울메이트/ 2015
*참고자료
경향신문. 2016.5.9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필동 거리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