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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Sep 22. 2016

상실, 너의 죽음이 남긴 선물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

중학생에게 '죽음'이란 어떤 느낌일까요?


상실감은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된 후, 또는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진 후 가지게 되는 느낌입니다.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이별과 상실은 결코 없어질 수 없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상실은 우리가 삶속에서 겪어야 하는 가장 어려운 과정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무리 상실을 피하려고 노력해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크고 작은 상실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을 잃는 것입니다. 관계가 깊었던 사람일수록, 대상을 깊게 사랑하면 사랑했을수록 그 상실감은 깊고 깊습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많은 이별을 경험하고 상실감을 느끼는 경우도 늘어나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어린아이나 청소년이 느끼는 상실감이 작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과 대상에 대한 순수한 몰입이 가능한 나이일수록 이별이 주는 상실감은 클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이것 좀 읽어보세요.”

학교 도서관에서 사서선생님이 내민 글을 읽으면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금요일 아침마다 참여하는 도서반 모임에서 그 때 중학교 2학년이었던 큰 아이가 쓴 글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슬펐던 일이 기르던 열대어의 죽음과 할머니네 이웃에 사시던 이모할아버지의 죽임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열대어가 어항위에 떠있는 것을 본 순간의 감정과 이모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느꼈던 슬픔을 아주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꼭 가야할 자리는 아니라는 어른들의 생각으로 한 번도 상갓집에 데리고 가지 않았던 아이였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이 죽음과는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집에서 기르던 거북이가 죽어 물위로 떠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잠깐 울었지만 거북이를 집 뒤편의 산 입구에 잘 묻어준 후로 금세 다시 명랑해졌었지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으며 펑펑 울던 아이였지만, 오래 기억하고 슬퍼하기엔 제제는 너무 먼 곳의 아이였습니다. 그랬던 아이가 ‘죽음’을 이렇게 생생하게 받아들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열여섯, 죽기엔 너무 이른 나이 


죽음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본능적인 공포입니다. 우리는 모두 평생 살 것처럼 매일매일 살아가지만, 어느 날 문득 죽음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순서도 없이 다가오는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주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나 너무나 안타까운 죽음을 들었을 때 다가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제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제는 결혼식이나 돌잔치 소식보다 누군가의 부고가 더 많이 들립니다. 솔직히 지인의 부모님 소천 소식은 그다지 슬프지 않습니다. ‘아, 이젠 우리가 서로의 부모님들의 장례식장에 다닐 나이가 되었구나. 살아계신 부모님들에게 더 잘해야겠다.’ 정도의 감흥을 불러오는 소식이지요. 그러나 갑작스런 부고는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아직 중학생, 고등학생이던 선배 언니의 갑작스런 돌연사,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두고 떠난 후배의 부고, 만삭을 앞둔 친한 동생 남편의 교통사고, 병을 이겨내고 결혼했었던 예쁜 후배의 병 재발 소식과 연이은 죽음 … 


우리 주변에는 이처럼 많은 죽음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슬픈 것은 채 피어보지 못한 꽃송이들의 덧없는 죽음일 것입니다. 어른들도 안타깝고 기가 막히는데, 아이들에게 또래 친구들의 죽음은 얼마나 놀라운,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소식일까요. 아직 떠날 수 없는 나이에 꽃잎이 흩날리듯 사라져 간 아이들의 죽음에 누군들 슬픔을 감출 수 있을까요.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에서 유미는 재준이를 잃었습니다. 전학 온 유미를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을 때 재준이는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어주었던 단 한명이었습니다. 유미의 상실감은 너무나도 커서 일상의 의미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재준아, 참으로 하잘것없는 문제 아니니…… 이 따위 돌멩이들의 단단한 순서를 외워 무엇에 쓴단 말이니, 네가 죽었는데, 내 가장 소중한 친구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설마 고등학교야 가겠지……아니, 못 간들 어떠하랴. 재준이가 죽어 버렸는데, 나는 바득바득 살아서 남들처럼 학교 가고 그래야 하는 걸까. 친구가 죽었는데, 친구가 사라져 버렸는데…… ( 67쪽)


아직 못 다핀 이들의 죽음은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큰아이와 같은 학년의 한 아이가 갑작스럽게 죽었습니다. PC방에서 게임을 하던 중 심장에 문제가 생겼는데 병원으로 이송 중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건강이 안 좋던 아이라는 이야기부터, 열 시간 넘게 계속 게임을 했다는 말, 장래희망이 프로게이머였다는 소리 등등. 겨우 중학교 2학년이던 아이의 안타까운 소식은 주변 사람들의 놀람과 함께 전해졌습니다. 친한 친구였던 아니었던, 어제까지 같은 급식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듣던 같은 나이 친구의 죽음은 아이들에겐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교실에 남은 빈 책상을 바라보며 아이들은 한참동안 웅성거렸습니다. 아이들의 충격과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조문을 가길 원하는 친구들에게 공부나 하라고 했다는 선생님도 있었고, 아이들이 충격을 받을 테니 죽음에 대해 자꾸 언급하지 말라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들의 반응도 다양했지요. 아이가 그렇게 오래 게임을 하게 방치했던 부모를 비난하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결국 장례식은 몇몇 친구들의 조문만 받은 채 치러졌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은 너무도 슬퍼하고 서운해 했다고 합니다. 며칠 후 큰아이는 매우 분개한 상태로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너희도 게임 좀 작작해라’고 말한 선생님이 있었다는군요. 큰아이는 자신은 얼굴만 알았던 학교 친구였지만 이렇게 안타깝고 슬픈데, 그 선생님은 죽음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화를 냈습니다. 그 죽음이 어떤 원인으로 일어났던 간에, 설사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일어난 일일지라도, 죽은 아이의 행동을 비난하고 그것을 이용해 다른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려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게임중독 때문에 친구가 죽었잖아, 너희도 게임 오래 하다가는 저렇게 될 수 있어.’ 또는 소설 속 재준이의 죽음에 대해 ‘조그만 것들이 오토바이나 타니까 죽지, 너희는 절대 오토바이 타면 안 돼.’ 이런 말들이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어른이 해야 하는 소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친구의 죽음을 겪은 사춘기 아이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상실감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위하여


미국의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선고받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그리고 수용의 다섯 단계의 심리적 태도를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퀴블러 로스에 따르면 처음에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다, 부정할 수 없음을 깨닫고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분노가 잦아들면 다른 것을 희생해서라도 죽음이라는 사실만을 되돌리길 간절히 바라는 타협의 태도가 나타나고, 뒤이어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깊은 절망감과 우울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겪고 나서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것은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합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다섯 단계가 반드시 순서대로 나타나지 않고 뒤섞여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단계들을 겪으며 조금씩 죽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재준이를 잃은 유미도 비슷한 과정을 겪습니다. 친구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미는 방황을 합니다. 재준이의 죽음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세상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미는 재준이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하다가, 분노하다가, 슬퍼합니다. 신을 원망하고 재준이가 죽어갈 때 딴 짓을 하고 있었던 자신을 원망합니다. 유미의 슬픔은 끝이 없어서 걱정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유미의 엄마는 그런 유미를 꼭 안아줍니다. 그리고 유미가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유미는 재준이의 엄마를 만나 세상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식 잃은 엄마의 울음을 함께 합니다. 또 담임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혼자만 재준이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고, 함께 재준이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울고 웃습니다. 용기를 내어 재준이가 죽었던 장소도 가보고 재준이와 함께 놀았던 장소도 찾아갑니다. 유미는 충분한 시간 속에서 충분히 슬퍼합니다. 함께 슬퍼할 사람이 있었기에, 유미도 재준이 엄마도 선생님도 조금씩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죽음으로 떠난 후 가장 중요한 것은 애도의 과정입니다.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거나 슬픔에 빠져 계속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 남아있는 사람의 삶에 치명적인 상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항상 우리 삶 주변에 있습니다. 어른만이 아니라 아이들 곁에도 있습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죽음을 통해 우리는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잃고, 헤어지고, 포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항상 절망하고 쓰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중한 사람을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과 경험을 내 삶 속으로 받아들이고 그 또한 나의 일부임을 깨닫게 됩니다. 만남과 이별로 변화한 새로운 내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또 다른 사람과 연결되면서 성숙해지는 것이 삶의 한 과정임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상실로 인해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상실로 인해 성장합니다.    


함께 슬퍼하고 안아줄 수 있다면


상실을 삶의 한 과정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를 겪어내는 과정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은 어른과 아이들 모두에게 중요합니다. 어른들에게도 죽음으로 사람을 잃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여장부인 줄 알았던 어머니를 무너뜨렸고, 제 가슴에 텅 빈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힘들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제 어깨위에 지워진 무게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지도 애도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마흔이 넘어서 맞이한 죽음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짧은 투병 끝에 돌아가신 스승의 죽음도 큰 상실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마음으로 의지하고 존경하던 분이라서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마지막 병문안에서 곧 다가올 이별을 예감했음에도 며칠 후 들려온 슬픈 소식은 저를 펑펑 울게 만들었습니다. 이십여 년 전의 어린 저도 나타났습니다. 그날 밤 현재의 저와 과거의 제가 꼭 끌어안고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죽음과 스승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죽음보다 스승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 제가 성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순간 사라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죽음인 동시에, 그와 함께 했던 내 자신의 일부를 영원히 떠나보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돌아가신 분들을 충분히 그리워하고 아파한 후 다시 기운을 내었습니다. 아버지와 스승님을 여전히 그리워하지만 이제 두 분을 떠올릴 때 슬프지는 않습니다. 제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계시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슬픔보다는 두 분이 제게 주신 사랑과 추억 덕분에 행복한 마음이 더 큽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힘은 막강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다시 일어날 힘이 있습니다. 만약 상실감에 빠져 힘들어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섣불리 위로하거나 빨리 잊어버리라고 재촉하지 마세요.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 슬픔은 마음속에 남아 자꾸 안으로 곪아 들어갑니다. 충분히 애도하고 슬퍼한 후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격려해 주세요. 물론 슬퍼하는 너의 곁에 너를 사랑하고 너를 걱정하는 부모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말입니다. 나에게는 이미 지나간 사건일지 몰라도, 깊은 상실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아직 현재진행형인 일입니다. 섣부른 위로로 슬퍼하는 사람을 나약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애도할 시간을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동일한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공감을 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들의 슬픔과 상실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이 동강 난 상실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저 그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99퍼센트 도움이 됩니다. 아이들은 친구의 죽음을 겪으며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것입니다. 죽음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삶에 대해서 말입니다. 


죽음이 남긴 선물


사람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어떤 것이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한다면, 그것들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구를 믿는다면 상처 입을 가능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통 받는 것이 두려워 피하려고만 한다면 그는 삶의 많은 것들이 부족한 채로 살아야만 합니다. 상실의 경험을 피한다는 것은 성장과 변화의 경험을 피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대하지 않는 삶은, 살아도 죽은 것 같은 삶입니다. 죽음의 교훈은, 살고 사랑할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최대한 충만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집니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유명한 라틴어는 ’아모르 파티 Amor fati '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죽음과 삶은 상반되어 보이지만 같은 방향입니다. 언젠가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과 상실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상실을 이겨낼 힘은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네 죽음의 의미는…… 모르겠다. 아마도 평생토록 나는 그걸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내 평생도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태어났다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그것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죽음이 지극히 어이없고,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네가 가르쳐 주고 갔으니까.

재준아, 네가 정말 보고 싶다. 네 죽음의 의미는 내가 너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이지. 그 한 가지는 너무도 확실하지. 황재준이라는 내 친구가 짧은 시간 이 세상에 머물다 떠났다는 거,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마음 속에 도저히 파낼 수 없는 무거운 사랑을 남기고 떠났다는 거……  잘 가라, 재준아, 이제는 떠돌지 말고 편안히 잘 가라…… (185쪽)


친구의 죽음을 통해 성숙해진 유미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과 헤어짐, 그리고 새아빠의 애정을 자신의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유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고 싶어하는 아빠의 모습까지도 사랑으로 품을 만큼 성장합니다. 유미는 재준이를 마음 한쪽에 영원히 품은 채 또다시 친구를 만나고 사랑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 함께 읽은 책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 이경혜. 바람의 아이들. 2004


저자는 2001년 어느 날 한 소년의 죽음을 접합니다. 전혀 모르던 아이의 죽음이었지만 며칠 동안 통곡을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그 또래의 딸아이를 둔 부모이기도 했던 저자는 어이없이 사라진 어린 넋들을 위한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합니다.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는 뜻밖의 반전은 없습니다. 재준이의 죽음에는 숨겨진 비밀도 없고, 숨겨진 갈등도 없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살았던 그의 죽음은 그래서 더 많은 생각거리를 품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을 겪은 유미의 1인칭 시점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면서 유미의 혼란과 슬픔, 분노, 그리고 성장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유미는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답을 찾아갑니다.


<상실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김소향 역. 이레. 2007 

<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이진 역. 이레. 2008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친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대표작입니다. 저자는 죽음을 앞둔 환자 오백여 명을 인터뷰하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인 다가올수록 느끼는 불안과 공포,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솔직한 태도 등을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수용하는 5단계 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어떻게 죽는가’가 삶을 의미있게 완성하기 위한 과제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죽음과 죽어감>이후 20여권의 저술을 하고, 역사상 가장 많은 학술상을 받은 여성으로 활동하던 퀴블러 로스는 중풍으로 온몸이 마비되어 9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게 됩니다. 병상에 있는 동안 그녀는 자서전을 비롯하여 <인생수업>, <상실수업> 등을 집필하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삶과 죽음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상실수업>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책입니다.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사랑했기에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다시 사랑하라는 위로와 실질적인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혹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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