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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Sep 04. 2015

여행, 내 몫의 비밀을 찾는 시간

사춘기, 내 인생에 한 달이 주어진다면

 “만약 일 년, 또는 한 달이 주어진다면 중학생 자녀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중학생 자녀를 둔 부모에게 물었습니다. 스무 명의 어른들은 대략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일 년의 시간을 두고 물었을 때 압도적인 1위는 해외여행이었습니다. 모두 15명의 부모가 자녀의 성별과 관계없이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길 바란다고 답했습니다. 한 달로 줄여서 물어보았을 때도 여행을 선호하는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국내여행 7분, 해외여행 7분으로 나뉘어졌을 뿐입니다. 여행 외에 나왔던 의견은 아르바이트나 직업 체험 등 사회 경험을 해보거나 취미를 길렀으면 좋겠다는 정도였습니다.  


 “중학생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싶니?”

아이들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열 명의 여학생들은 일 년이 주어진다면 세계일주, 해외여행, 영국여행, 미국여행, 일본여행, 해외 봉사 등 해외여행이 가장 많았고 그 외 바다 가기, 맛 집 찾아다니기, 그림 그리기, 아이돌 만나기, 드럼 배우기, 소설쓰기, 사진 찍기 등을 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한 달 동안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보았을 때는 아이돌 콘서트나 팬 사인회를 가고 싶다는 대답이 5명, 우리나라 여행을 다니고 싶다는 답변이 4명으로 비슷했습니다. 캠핑카를 타고 다니고 싶다는 아이와 도보와 자전거로 국토순례를 하고 싶다는 아이처럼 구체적으로 대답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연예인만큼 웹툰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한 달 동안 애니메이션 정주행(1회부터 끝까지 쭉 보는 것)을 하겠다는 아이들도 3명이나 되었습니다. 여학생과 남학생의 대답은 약간 차이가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은 일 년이 주어진다면 이구동성 여행을 가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해외 배낭여행이나 국내 여행, 자전거 여행, 도보 여행, 전국 일주 등 다양한 형태의 여행을 원했습니다. 한 달 동안 하고 싶은 일은 여행과 게임, 운동이 비슷한 선호를 보였습니다.  


짐작하시는 것과 큰 차이는 없지요? 부모도 중학생 아이들도 일순위로 꼽은 것은 모두 여행입니다. 부모는 여행을 가장 권하고 아이들도 여행을 가장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좀 더 속이야기로 들어가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들은 다양한 경험을 하고 넓은 세상을 보면 자녀의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철도 들고 공부 동기도 생기지 않을까 기대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경험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 셈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여행을 원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일상의 탈출입니다. 학교-학원-집, 매일 되풀이되는 쳇바퀴를 벗어나길 기대합니다. 짧은 짬을 내어 웹툰을 보거나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카톡을 하는 현재의 생활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 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설레지 않으시나요? ‘낯선’이란 단어가 좀 부담스럽다면 ‘새로운’ 은 어떤가요? 새로운 장소,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확실히 매력이 있지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든, 쳇바퀴 도는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서든, 이구동성 외칩니다. 

  “여행을 보내야죠!”

  “여행가고 싶어요!”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주인공 15살 준호에게 불쑥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엄마의 재혼이라는 암담했던 현실 속에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온 것입니다. 빽빽한 일정을 짜고 이것저것 짐을 꾸리며 마음이 설레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여행이었습니다. 단짝친구의 부탁인데다가 그들의 영웅인 친구의 형을 만나야 한다니! 형사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운동권 형님에게 도피자금과 여권을 가져다주어야 하는, 폼 나고 멋진, 모험. 더군다나 혼자서. 


그러나 준호가 꿈꾸던 모험이 악몽으로 변한 것은 바로 그날 밤부터였습니다. 계획대로 숨어든 막걸리 트럭에서 만난 뜻밖의 인물들. 서로에게 밝힐 수 없는 사연을 품은 같은 반 정아와 승주, 낚싯대를 휘두르는 이상한 할아버지, 거기다 미친 듯 날뛰는 개 루즈벨트. 얼떨결에 동행이 되어 버린 일행들. 이들은 캄캄한 밤중 산을 넘고 진창길을 뚫고 좌충우돌, 때로는 생명의 위협도 느끼며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 속을 헤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특이한 여행에 휘말린 세 명의 아이들은 나흘 동안 세상 어디에서도 겪을 수 없는 경험을 합니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몰랐던 서로와 부대끼며 자신들이 행해야 할 것을 위해 목숨을 겁니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날 그들은 무언가를 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겪는 모험은 보통 부모들이 상상하는 ‘견문을 넓히는 여행’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아이들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기점이 됩니다.  


우리가 봤던 낯선 것들, 아름다운 것들, 빛나는 것들. 아니 어떤 말도 그들을 칭하는 데 적당하지 않을 거야. 세상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던 그들을, 나는 그냥 ‘비밀’이라 부르기로 했어. 내 인생의 첫 비밀. 어쩌면 우리가 함께한 며칠은 우리 인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법을 가르친 신의 특별한 수업이었는지도 몰라. (381쪽)


이렇게 무시무시한 여행을 실제로 자녀에게 권할 만큼 우리의 간덩이가 크지 않다면, 아이와 함께 준호와 승주, 그리고 정아의 모험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요? 같이 열광하고 조마조마해 가면서 말입니다. 찬란했던 그 녀석들의 고래를 내 아이와 함께 상상해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 15살 엄마와 아빠가 꿈꾸었던 오래된 고래를 아이들과의 대화 속으로 되살려내 이야기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엄마와 아이, 아빠와 아이 만의 소중한 비밀이 될 것입니다. 

   

세 명의 아이, 부모가 준 세 가지 상처


준호, 승주, 정아, 세 명의 아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이들은 아닙니다. 준호는 몇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빠를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합니다. 아무도 아빠의 부재를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혹시 아빠가 나 때문에 도망친 건 아닐까 생각할 때마다 악몽 속에서 아빠가 떠나던 마지막 날이 되풀이될 때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외롭고 힘이 듭니다. 설상가상 엄마는 임신을 하고 연하의 아저씨와 재혼을 한다고 합니다. 승주는 5대 독자가 죽을까봐 벌벌 떠는 부모의 보살핌이 감옥입니다. 툭하면 학교로 쫓아오는 엄마의 치맛바람과 촌지폭탄은 제대로 친구를 사귈 기회도 주지 않습니다. 부모로 인해 고립된 승주는 혼자만 아는 독불장군, 고자질쟁이가 되지만 늘 바깥세상을 힐끔거립니다. 아들이 죽는다는 예언에 감금을 불사하는 부모의 빗나간 사랑은 결국 승주를 도망쳐 나오게 합니다. 성적은 신의 경지, 성질은 개의 경지라 불리는 정아. 미친개라 불리는 아버지의 폭력에 속옷 바람으로 쫓기면서도 아버지의 매에 골병이 든 엄마를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습니다. 정아는 냉소와 무관심으로 스스로를 방어하지만 상처는 점차 깊어집니다. 정아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으로 힘들어하는 준호를 오히려 미워합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만큼 큰 아픔이 있을까요?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는 세 아이들이 낯선 세상 속으로 뛰어들면서 겪게 되는 험난한 여정을 뒤쫓으며 그들이 가진 상처를 조금씩 보여줍니다. 세 명의 아이들이 안고 있는 상처는 대부분 어른들, 그 중에서도 부모 때문에 생긴 것들입니다. 어떤 어른에 비해서도 절대 가볍지 않은 아이들의 상처입니다. 아이들이 나흘이나 사라졌어도 어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호들갑은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절대 그 나흘을 잊지 않습니다. 힘든 자신의 운명을 피해 낯선 곳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돌아와 자기 몫의 운명을 껴안습니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스스로를 믿게 된 것입니다.      


중학생은 스프링 캠프  중입니다!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야구단들의 스프링캠프 소식이 들려옵니다. 정규 시즌을 맞이하기 전에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모습들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5살 중학생 아이들은 지금 스프링 캠프 중입니다. 이리저리 몸을 풀고 새로운 폼을 시도해 보며 스스로를 시험하는 중입니다. 스프링 캠프에서 열심히 몸을 푸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너무 일찍 승률과 타율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온 몸이 열정으로 들끓는 아이들의 시기를 차가운 어른들의 시선으로 재단하고 다그치는 조급함에 빠져있지는 않나요? 우리 어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고래를 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온갖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믿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데뷔하기 전에 스스로의 가능성을 마음껏 실험해 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의 일상에 여백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이에게는 아이 몫의 삶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그 몫의 비밀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여백과 쉼을 허락해야 합니다. 어른들 눈에는 시간낭비처럼 보이는 다양한 경험들 속에서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멀리 떠나야만 새로움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움’이란 ‘다름’과 동의어입니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낄 수만 있다면, 지금 있는 곳에서 늘 보던 사람들과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일상의 패턴을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익숙한 일상은 편하지만, 동시에 지루함이 되기도 합니다. ‘편하다’의 반대는 ‘불편하다’일 수도 있지만 ‘낯설다’도 있고 ‘새롭다’도 있습니다. 학교-학원-집으로 이어지는 익숙하고 지루한 일상에 변화를 주는 것은 작은 것부터 시도할 수 있습니다. 지루했던 일상에 새로운 매력을 더하는 일입니다. 그 새로운 매력은 삶을 풍성하게 하고 윤기 있게 합니다. 더 잘 살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어른과 아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오마이 겐이치는 사는 곳을 바꾸거나 새로운 사람을 사귀거나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이 세 가지 방법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길고 먼 그리고 비싼 여행보다, 주어진 시간을 다르게 사용해 보는 것이 부모에게나 아이에게 훨씬 쉬운 방법입니다. 


한 달. 길지 않지만 절대 짧지도 않은 시간입니다. 매년 두 번씩 주어지는 방학. 이번 방학은 아이와 함께 어떻게 보내셨나요? 


만약 한 달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부모의 간섭이 없는 완전한 자유생활-먹는 것, 자는 것, 책 읽는 것, 게임, 운동, 씻기 등 생활 모든 영역에서-을 주고 싶다고 대답한 부모도 있었습니다. 되풀이되는 하루하루와 무거운 일상에 지친 부모와 우리 아이들. 내가 바라는 나의 시간과 아이가 바라는 아이의 시간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만 공감한다면, 방학이 '전쟁' 보다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에게 일 년이 주어진다면 전기가 안 통하는 시골에서 6개월 살고, 3개월은 국내 도보여행, 2개월은 외국 여행, 그리고 마지막 1개월은 아무 것도 안하기... 한 달이 주어지면 외국에 가서 살게 하고 싶어... 그런데 이건 내 희망이네!" 


* 함께 읽은 책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정유정, 비룡소, 2007

<난문쾌답> 오마에 겐이치. 흐름출판. 2012


<책 속의 또 다른 생각거리>

살아있는 역사는 사람을 통해 다가온다


아이들의 모험에 유일하게 어른이 한 명 동참합니다. 낚싯꾼 할아버지는 상처가 많은 인물입니다. 총칼을 든 계엄군의 봉쇄 때문에 병든 딸과 광주 시내를 헤매다가 결국 등에 총 맞은 딸을 가슴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모진 세월을 보내고 미친 노인네로 취급받아 감호소에 갇혔습니다. 


그리움이 사람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이해합니다. 살아남아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 사람, 죽은 딸을 그리워하는 불행한 아버지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모험을 완성합니다.  


역사 교과서의 짤막한 기술로는 절대 전달되지 않는, 몇 줄의 행간 속에 숨은 사람 이야기. 

-<초등학생용 한국사능력 검정시험 준비서>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광주에서 딸아이의 시신을 안고 통곡했던 할아버지 이야기에 부모와 아이가 함께 눈물이 핑 돌아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숫자로 표현되는 학교생활을 넘어서서 사람 냄새가 풍기는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라면 말입니다.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배우는 큰아이는 자주 화를 냅니다. 짜증 난다고도 합니다. 이게 뭐냐고, 어른들은 왜 이런 거냐고요. 가끔은 할 말이 없습니다. 첨성대를 보며 신기해했고, 백제금동대향로에 감탄했던 어린아이가 훌쩍 자란 것입니다. 중학생 아이와 함께 살아있는 우리 역사와 사회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시간, 부모를 바라다보는 아이의 눈빛이 생생하게 빛날 것입니다.

 

* 참고 :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정유정, 비룡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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