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두둑 두두둑 두두두둑
주변의 다른 모든 소리를 잡아 삼키며 거센 비가 내린다. 괜찮겠느냐고 매표소 안내직원이 묻는다. 휩쓸릴 수도 있으니 반드시 방갈로 위에 텐트를 치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아빠는 혼자서 하겠노라 차 밖으로 나섰고, 거센 장대비를 맞으며 짐을 날랐다. 보다 못한 엄마도 동참. 조마조마한 시간이 흐른 뒤 텐트는 모양을 갖췄다. 차 안에서 동생과 숨 죽이고 기다리며 하늘을 원망했는지 그저 여행이 설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에 묻은 물기를 말리며 이것도 추억이라고 웃던 아빠와 엄마의 얼굴은 생생하다.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와 싸늘한 냉기. 오랜만에 엄마 품에 꼭 안겨 잠든 밤이었다. 훅~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에 눈을 뜨니, 언제 그랬냐는 듯 비는 말끔히 그치고 빗방울에 반사되는 햇빛이 강렬한 아침을 알렸다. 밤 내 텐트 안에서 웅크렸던 몸을 쭉 펴며 우리 가족은 산책을 나섰다. 숲이 전하는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나뭇잎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을 톡톡 건드리며, 비가 그쳤음을 반기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질퍽한 땅을 밟고 걷는 길. 나무 사이를 비집고 비추는 햇빛이 신비로운 동화 속 숲을 연상시켰다. 아빠의 여름휴가로 떠난 청옥산 자연휴양림에서의 이야기다. 그리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릴 적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제일 먼저 떠오른다.
텐트 여행이 처음은 아니었다. 바닷가에 살았기에 곧잘 집 근처 바다에서 텐트를 치고 1박을 했다. 지는 해를 벗 삼아 모래놀이를 하던 일이 꽤 잦았던 기억이 난다. 가만 되짚어 보면 숲 속 텐트 역시 처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유독 12살의 청옥산 여행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뭘까. 장대비 때문인 듯하다. 설레며 떠나왔던 길에서 그대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원망, 매표소 직원까지 걱정했던 위기, 비바람에 겨우 라면을 끓여 먹었던 긴장, 비를 홀딱 맞은 아빠와 엄마가 아프시면 어쩌나 마음 졸인 걱정. 이 모든 감정이 반전을 맞이해 그러했던 것은 아닐까.
장대비를 만난 것처럼 여행이 늘 안전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기도 하는 등 여러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사건과 사고가 있었다고 해서 여행이 나쁘게 기억되는 일도 거의 없다. 다음 날 반짝였던 햇볕처럼 반전의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상황을 해결하는 힘,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배우는 것이 여행의 큰 매력이 아닐까.
여행의 힘을 믿는다. 인생을 살아갈 여유를 배우고, 난관을 헤쳐나갈 용기를 가르쳐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이와 가능한 많은 곳을 여행하고 싶다. 힘들어도 즐거울 수 있음을, 고생도 좋은 추억이 됨을 아이가 몸으로 경험하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도 여행하듯 즐겁게 살아가면 좋겠다. 나 역시 여행과 인생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즐겁게 살고 싶기에 그 바람을 모두 담아 오늘도 아이와 함께 어디론가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