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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한 달을 살아 볼래요

아이와 제주

by 여유수집가

"따라 올래?"


여행광. 회사를 다니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당당하게 내 돈으로 떠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장기 휴가를 쓰는 것이 그리 녹녹지 않았지만 매년 한 번 이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몇 개월의 에너지 충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휴가가 필요 없는 주말여행은 언제나 대기 중이었다. 이런 내게 친구들은 역마살이 있다고도 했다.


이건 다 엄마가 되기 전의 이야기. 엄마가 되고 보니 눈 질끈 감을래야 감을 수가 없었다. 아기 한 명을 데리고 떠나기 위해 챙겨야 할 짐이 너무 많았고, 고려해야 할 환경적인 요소도 너무 많았다. 아기를 떼어놓고 떠날 배포도 없었다. 그런 내게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남편이 목, 금의 1박2일 일정으로 제주도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게다가 먼저 따라오라는 제안까지.


남편은 자신의 섣부른 제안을 곧바로 후회했다. 딴생각을 자주해 길에서 종종 부딪히고, 넘어지는 내가 불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말은 이미 입 밖으로 나왔고, 후회는 늦었다. 꾹 눌러가며 참아왔던 마음이 툭 튀어나온 뒤라 아무도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금요일 휴가를 내고 공항버스를 타고 뒤 이어 비행기까지. 나는 무적엄마가 되어 아이와 단 둘이 첫 여행길에 올랐다. 물론 아이는 비행기도 제주도도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아이도 엄마의 긴장을 느껴서일까. 소리 빽 지르는 것도 없이 남들에게 크게 민폐를 끼치는 것 없이 엄마가 무사히 아빠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왔다. 무엇이든 처음이 쉽다. 한 번 아이와 제주도를 다녀오고 나니 보고 오지 못한 장소들과 만나지 못했던 쨍한 날씨까지 아쉬움이 남더라. 게다가 제주도는 눈 살짝만 감아도 떠날 수 있고, 크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기에 아쉬움은 더더욱 포기가 안됐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의 가능성까지 알아버린 여행광. 아쉬움을 아쉬움으로 남겨두지 못했다. 비가 오는 제주 다음에는 날씨 좋은 제주를, 유채꽃 핀 제주 다음에는 동백꽃 핀 제주를, 벚꽃 핀 제주를. 그렇게 매번 돌아오는 길에 남는 아쉬움을 채우고자 다시 또다시 찾았던 제주도 여행은 이제 아홉 번이 됐다. 18개월 처음으로 제주도를 찾았던 아이는 이제 60개월이 되었고 말이다.


제주도는 같은 대한민국이지만 전라도, 강원도를 찾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섬이 주는 고립감이 일상과의 간극을 더 크게 하고, 제주도만의 현무암과 오름, 곶자왈이 시간을 느리게 만들어준다. 내 여행욕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라도 그냥 제주도에 가면 쉴 수 있다는 생각, 편안해질 것이라는 마음이 매번 다시 제주로 나를 이끈다. 거기에 제주도가 가진 수많은 여행 명소들은 부록으로 따라와 낯선 매력을 여전히 발산한다.


아이도 나처럼 제주도를 좋아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제주도가 아닌 그 어디라도 부모와 함께라면 행복한 나이니까. 하지만 내 마음이 편안하면 아이를 대하는 것에도 여유가 생기기에 나와 아이 모두에게 좋은 제주라 믿고 있다. 그렇게 여행이 주는 치유의 힘이 아이에게도 시나브로 스며들고 있을 것이다.


20170401_133051.jpg 17년4월, 아홉번째 제주

아이와 함께한 아홉 번의 제주. 같은 장소를 다시 찾은 것을 제외하고 56곳의 장소에 들렀다. 절물자연휴양림은 세 번을 다녀왔음에도 다시 또 가고 싶다. 물론 아직도 가지 못한 곳도 남아있다. 아홉 번이 열 번이 되고, 스무 번이 된다고 제주도가 지겨워질까. 손님이 아닌 도민으로 살아보면 아쉬움이 덜 남을까. 그래서 이제는 눈 정말 꽉 감고, 제주도 한 달 살기를 계획하고 있다. 또 다른 제주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그렇게 아이와 제주 여행은 계속 진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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