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옷장지기 소령님 Apr 09. 2019

옷장 정리, 아무리 해도 정리가 안돼.

[ 열린옷장, 비영리로 스타트업하기 ] 제19화.

발단은 한 권의 책이었다.


패션 심리학자로 불리우는 제니퍼 바움가르트너가 쓴 '옷장심리학'이라는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단지 '옷장'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마음을 끌어 읽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그녀에 의하면 옷장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옷장에 변화를 주면, 인생도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의뢰를 받으면 의뢰인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옷장을 들여다보며 컨설팅을 해주고 있었다. '와~~나도 옷장 컨설팅 한 번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다보니 머릿 속 LED전구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래! 우리도 옷장을 찾아 나서보자! 가만히 앉아서 기증이 오기를 기다릴 필요 없잖아. 집집마다 찾아가 옷장을 정리하면 기증할 정장이 나오지 않을까? 그래! 바로 그거야. 기증은 옷장 정리로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그렇게 기증받은 정장으로 모두를 위한 거대한 옷장을 만드는 거야!


때마침 서울시에서는 비영리민간단체를 대상으로 지원사업 공모를 하고 있었다. 서둘러 정보를 찾아보니 바로 오늘이 마감! 마감까지 불과 두 시간 남았다. 후다닥 제안서를 만들었다.  


마음은 굴뚝이지만 여건상 전국을 다 찾아갈 순 없으니 일단 서울 시내로 지역을 한정했다. 하반기 6개월 동안 72가구의 서울시내 가정을 정리 대상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옷장 정리에 선정되기 위한 요건은 딱 하나! 기증할 정장이 있어야만 정리를 받을 수 있다.


정리는 예비사회적기업인 '착한정리(주)제타랩'의 전문적인 도움을 받기로 했다. 우리의 S.O.S에 제타랩의 김호정 대표님은 흔쾌히 함께 서울 곳곳을 누벼보자고 응해주셨다. 그렇게 해서 2013년 6월말부터 '서울시민 열린옷장' 프로젝트의 옷장 정리가 시작되었다. 


옷장 정리가 꼭 필요한 분들을 엄선하기 위해 신청하게 된 이유를 받아보니 어느 한 집도 사연없는 집이 없었다. 태어나서 30여년간 한 집에서 살아왔는데, 직장생활 때문에 늘 바쁘신 엄마의 30년 된 옷장을 정리해달라는 분도 있었다. 39살의 초보맘인데 아이를 돌보다 보니 옷장 정리를 포기하고 산지 오래됐다며 꼭 도와달라는 분도 있었다. 10여년 만에 이사를 가는데 안 입는 옷까지 함께 가져가고 싶지는 않다는 분도 있었다. 


어떤 사연의 어떤 집이든 남의 옷장을 정리한다는 건 과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은 훨씬 더 오래 걸렸고, 일찍 찾아온 여름 탓에 힘도 두 배로 들었다. 


더구나 처음에는 홍보가 부족하고 허술하다 보니 '정장 기증'에는 관심이 없고 '무료 옷장정리'에만 혹해서 신청하는 분들이 꽤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정리를 마치고 나면 기증받을 정장이 없어 맨 손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옷장에서는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많은 옷들이 쏟아져나왔다. 상표를 떼지도 않은 채 같은 옷이 여러 벌 있는 경우도 있었고, 몇 년 동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옷을 찾았다며 반가워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주부님은 워낙 한 계절 이상은 입지 않는 습관이 있다 보니 늘 옷이 쌓이기만 한다는 분도 있었다. 확실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옷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구입만 반복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정장을 기증받았다. 티셔츠, 청바지 등 정장 외의 아이템들은 제3세계로 옷을 나누는 비영리단체 '옷캔'으로 기증했다.   


그 해 11월 말로 서울 시내 72가구의 옷장 정리가 끝이 났다. 

옷장 정리를 끝낸 후 두 손을 꼭 잡으며 고마워하는 많은 분들을 만났다. 단지 옷장을 정리했을 뿐인데 인생이라도 정리해드린 듯 환해진 표정으로 '앞으론 정리도 잘하고 절약도 잘하면서 살겠다'는 말씀들을 하셨다. 그럴 때마다 땀흘린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옷장정리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옷장 속에서 잠자고 있는 옷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서울시민 열린옷장 프로젝트를 통해서는 겨우 72가구의 옷장 문을 열었지만, 앞으로 우리가 열 옷장은 세상 곳곳에 너무나 많이 남아있다. 우리의 옷장 욕심은 계속 될 것이다. 






Tip for your start. 

"당신의 옷장은 안녕하십니까?" 


지금 내 옷장에도 정리가 필요한지 한번 체크해보세요.

1> 옷장과 서랍에 옷을 넣을 공간이 부족한가?  

2> 10년 전에 입었던 옷도 가지고 있는가?

3> 얼룩이나 보풀이 심한 옷도 가지고 있는가?  

4> 너무 크거나 작은 옷도 가지고 있는가?

5> 입을 옷이 충분히 많은 데도 계속 사는가?   

6> 버릴 옷과 간직할 옷을 구분하기가 어려운가? 



[ 열린옷장, 비영리로 스타트업하기 ] 제19화 끝.

* 본 글은 2013년 <다음 스토리볼> 연재본을 리라이팅하여 포스팅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터뷰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