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템플스테이의 첫 일정은 수련원에서부터 범어사까지의 산책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미션은 ‘무념무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1부터 숫자를 세며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되, 중간에 다른 생각이 들면 다시 처음부터 숫자를 세어야 한다. 그리고 30분이 채 되지 않는 숲길을 걷는 내내 나의 숫자는 단 한 번도 5를 넘기지 못했다. 야레야레, 이것 참 큰일이군! 다시 제대로 가방을 싸서 동해로 갔다.
“행복은 그냥 마음먹기 나름인 걸까? 그러면 애초에 보라카이에 올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닐까? (장강명, <5년 만에 신혼여행>)”
정말이지 그럴 수만 있다면 애초에 동해에 갈 필요가 없었겠지만. 당장의 먹고 싸는 생활 속에서 적정 비중의 읽고 쓰는 삶을 유지하기에는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있으며 그 와중에 먹고 싸는 것마저도 그다지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매일의 출퇴근 길에서 '행복'을 마음먹기란 아무래도 요원한 일 같았다.
“그리고 수순대로 길 위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과연 집으로 돌아가서 꼭 필요할 이유는 무엇일까 자문하게 된다. (김혜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3박 4일 동안 먹고 싸기 외의 생활적인 것들을 제쳐두고 읽고 쓰는 데 집중했다. 밀린 방학 일기를 쓰는 심정으로, 지난 1년간 마음속에 두서없이 쌓여있던 감정들을 몇 가지로 정리했다. 글로 쓰인 것들은 이런 게 내 안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예상과는 다른 모습일 때가 있다. 그렇게 때때로 그 결과물들에 놀라곤 하면서, 부지런히 마음을 비우는 시간이었다.
“고독의 즐거움과 고립의 절망감”
미색 소파에 앉아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한낮의 햇살에만 기대어 책을 읽다가, 역시! 이 고독이 너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곧바로 고립이 두려워진다. 고독과 고립 혹은 자기 의심과 자기 확신은 하나의 쌍이라, 마흔에도 예순에도 이 둘 사이를 계속 갈팡질팡할 거라 생각하면 여간 피곤한 게 아니지만, ‘여기서라면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있어 참 다행이다. “세상에. 내 삶은 여기에 있어.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 내 집에 있어.”
올해의 책: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