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만, <메피스토>
2008년 광화문에서 광우병 시위가 있던 새벽, 나는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채팅창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하더니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현장에서 찍은 동영상에선 전경이 쓰러진 여대생의 머리를 군홧발로 짓밟고 있었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21세기에 서울 한복판에서 아직도 이런 일이 생기는 게 맞는 건지. 더 놀라웠던 것은 그 와중에도 공중파방송에서는 아무 속보도 내보내지 않았고, 다음날 아침 뉴스에 잠깐 소개될 뿐이었다.
우리 집에서 지하철로 30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곳에서 내 또래 누군가는 뜻을 관철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다는 것은 생각 없이 게임이나 하고 있었던 나에게 괴리감과 부끄러움을 주기 충분했다. 인터넷엔 과격 시위대와 경찰의 과잉대응이라는 각자의 입장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호기심이 생겼던 나는 다음 시위가 예정된 날 광화문으로 향했다.
바짝 긴장하고 갔지만 딱히 별일은 없었다. 각지에서 모여든 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사람들을 인솔해 광화문 일대를 빙글빙글 돌았다. 정파와 관계없는 위트 있는 단체명도 많았다. 한 시간여를 걷다 도착한 곳은 광화문 8차선 도로. 사람하나 들어가지 못하게 배치된 전경버스와 2층으로 쌓아 올린 컨테이너박스 장벽, 일명 명박산성을 처음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와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어떻게 할 견적이 안 나오겠는데?' 사실 뭘 어떻게 하려는 사람들도 없었다. 끼리끼리 모여 둘러앉아 간식을 나누는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과격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거기서 나는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는 듯싶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는 후부터 나는 시위에 나가거나 투쟁하는 사람들을 리스펙트 한다. 시위가 내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더라도 그들뿐만 할까. 우리와 같이 생활이 있고 가정이 있는 일반 사람들로 그들 역시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빼가며 나온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관철될지도 모르는 일을 위해서. 견적이 안나오면 쉽게 포기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시위에 나가는 사람들을 폄하하거나 비꼬지 않는다.
그 이후로 자신의 정치관이나 신념을 피력하는 예술가도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옹호받기도 했지만 비난받기도 했다. 누구는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누구는 직장을 잃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은 것을 보면서 나도 내 만화에 내 의견을 슬그머니 빼기 시작한 것 같다. 일단 재미가 우선이라는 명목아래. 결국 용기가 없었다. 색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 색을 싫어하는 독자들을 잃는 것이니까.
"넌 햄릿이 아니야." 왕자가 대꾸했다. "네겐 고뇌와 깨달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기품이 없어. 네가 고통을 겪었다고 하지만, 멀었어. 그리고 네 인식은 멋진 직함이나 상당히 많은 봉급을 받을 만큼밖에 안 돼. 넌 기품이 없어. 넌 권력의 원숭이 고 살인자의 기분 풀이용 광대이기 때문이지. -372p
<메피스토>의 주인공 헨드릭은 천재 연극배우이다. 베를린에서 출세가도를 달리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고 나서 생존과 영달을 위해 권력에 굴복하고 전향한다. 같이 혁명을 꿈꾸고 토론하던 옛 극장동료에겐 내부에서 투쟁 중이라고 핑계만 일삼는다. 그 후 모진 고문으로 절친이 죽게 되고 캐릭터에 몰입할 수 없는 배우로서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된다. 현실과 타협하던 중에서도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신념을 가진 옛날의 헨드릭마저 잃어 버린것이다.
나도 가끔씩 무서워 지곤 한다 어느새 타협과 자기 검열에 길들여진 것이 아닌지, 무색으로 일관하다 색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