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맛의 위로를 경험했다.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그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셈이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까먹는 귤, 퇴근 후 마시는 맥주 한 잔, 계절마다 구태여 찾아 먹는 음식을 세어보면 이 맛의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나의 삶을 이루는 것 같다."
- 정보화 <계절의 맛>
지인들과 인생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인생 음식이란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을 말한 것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비싸거나 특별한 것보다는 소소하고 흔한 것만이 떠올랐다. 어느 시절이 담긴 음식들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깐풍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다. 지갑이 얇던 대학생 시절이었다. 생일과 같이 특별한 날이면 친구들과 돈을 조금씩 모아 중국집에서 식사와 술을 해결하곤 했다. 주로 네댓 명이 모여 탕수육 대자와 이과두주 두어 병을 시켜놓고 사장님께 애교를 부려 짬뽕 국물을 얻어먹었다. 중국집에서 우리는 지금의 처지를 슬프게 여겼다. 언젠가 우리가 취직을 하고 돈도 벌면 그때는 탕수육이 아니라 깐풍기를 시켜 먹자, 중국집에는 비싼 요리들이 많지만 일단은 깐풍기부터 시작하는 거야. 우리는 매번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해서, 중국집에서 요리를 시킬 때면 늘 깐풍기를 고른다. 왠지 깐풍기를 먹는 일은 모든 것이 막연하고 불안했던 그 시절의 나에게 전하는 위로라든지, 그런대로 잘 살아왔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더 어릴 적을 생각하면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식혜가 떠오른다. 명절이 되면 손주들을 위해 며칠 전부터 식혜를 손수 만들어 놓으셨다. 할머니가 만든 식혜는 밥알이 무척 많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식혜를 마실 때는 결국 큰 숟가락으로 여러 번 퍼먹어야 했는데, 아마도 어린것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다. 게다가 식혜는 너무 달지도 않아서 갈증이 날 때마다 얼음이 서릴 정도로 찬 것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했다. 내가 중학생쯤 되었을 때였던가. 언젠가부터 할머니는 식혜를 만들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노쇠하고 피로해진 몸과 전부 말라버린 삶의 의지를 전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식혜를 더 이상 맛볼 수 없다는 아쉬움보다는 할머니에 대한 서글픈 마음이 더 크게 다가왔었다. 그 이후에도 종종 캔에 담긴 식혜나 시장에서 파는 것들을 마실 때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인공적인 단맛이라든지 간신히 느껴지는 밥알을 목으로 넘기다 보면 여지없이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이제는 먹을 수 없는 그때의 정성스럽고 든든한 식혜가 생각났다.
그 외에도 나와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는 음식들이 있다. 청량 초등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 아버지의 된장 미역국과 엄마의 된장찌개, 할아버지가 사주시던 보름달빵과 흰 우유, 독서실 휴게실에서 친구들과 먹던 라면볶이, 교환학생 시절 가장 그리워했던 왕십리 뼈다귀 해장국, 춘천 훈련소 앞에서 먹었던 닭갈비, 연애할 때 자주 찾았던 손두부집 전골, 여행 중에 마신 수제 토마토 주스... 그렇게 내가 먹은 음식들에는 어느 한 시절이 담겨있었고 그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내 삶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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