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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석 May 19. 2020

서대전역 이야기.

At the Train Station #1

1.

대전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젊은 시절, 직장동료로부터 '고기 잘 사 주는' 늙다리 총각을 만나 결혼하여 그의 고향 목포로 이주하였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챙겨야 할 시동생이 줄줄이 사탕에 남편의 경제 사정도 넉넉지 않아 고생하던 그 시절, 엄마가 바쁘지만 가장 기뻐 보일 때는 친정에 갈 준비를 할 때였던 것 같다. 물론 엄마의 기분을 망칠 두 남자아이들이 함께였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2.

엄마는 그 긴 여정 (통일호로 약 5시간, 새마을호로는 3시간 남짓) 동안 산만한 두 남자아이를 과자와 오징어로 달래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금강하구둑이 생기면서 엇갈린 강경과 논산의 희비, 어떤 사건으로 잊힌 익산의 옛 이름, 광주가 아니라 송정리를 지나는 이유, 영산포의 전성시대 같은. 토요일, 심지어 일요일도 출근해야 했던 아빠 직장의 사정상 기차표를 사주는 것 외엔 이 번잡스러운 긴 시간을 지켜봐 줄 사람은 엄마뿐. 그나마 아빠의 직함이 올라갈수록 커져가는 아파트의 평수만큼 우리의 서대전행 여정도 줄어만 갔다. 통일호에서 무궁화호로, 이따금 무궁화호 특실로, 아주 가끔 새마을호라도 탈 수 있게 되면 (비록 반조리에 가깝지만) 식당칸에서 함박스테이크를 먹게 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3.

그렇게 긴 여정 후에 도착한 서대전역은, 정작 엄마의 고향집에선 제법 먼 곳이었고, 버스를 기다리길 1시간, 버스를 타고 1시간은 가야 발 좀 뻗을 수 있었다. 도착의 기쁨은 잠시였고, 친정이라고 해도 엄마가 편히 쉬며 웃는 모습은 크게 기억나지 않는다. 나와 동생도 그곳에서만큼은 그저 외조카 1,2 외손주 1,2였고 엄마의 보살핌 없이 방구석에 앉아 내 집보다 작고 잘 나오지 않는 브라운관 화면만 하염없이 마주하곤 했다. 


4.

전라도 출신 남편을 둔 여동생 앞에서 ktx가 서대전에 서지 않는 건 전라도인들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일갈하던 오빠에게 충청인들의 이기심으로 고속선의 표정속도를 갉아먹은 오송도, 충청 남부 주민들의 열망에서 절망으로 바뀐 공주역의 존재며, 심지어 대전 도시철도도 내다 버린 서대전역의 처지를 조용히 말씀드리지 못한 건 늘 억울하고 억울한 일이지만 정작 ktx도 잘 서지 않는 서대전에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여동생보다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는 것 같은 건 그건 그냥 내 기분 탓이겠지.


5.

그런 서대전역에, 작년 외할머니 생신에 바깥양반과 ‘itx’ 새마을호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인사드리러 다녀왔다. (사실 대전역으로 가면 더 빠르지만) 외손주 며느리를 처음 만나고 아이처럼 반가워하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보면서 손주가 왔을 땐 늘 시큰둥하시더니 싶었지만, 학교 왔다 갔다 하며 니 엄마가 그 먼 길 얼마나 고생했나 모른다, 어이구 어여쁜 손주며느리, 하며 쓰담 쓰담할 때는 시간의 흐름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6.

이제는 훌륭한 드라이버인 엄마는 더 이상 기차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친정을 다녀오신다. 서울에 살게 된 나는 예전만큼 엄마와 기차를 탈 일이 없다. 종종 지방 출장길에 옛 역명들을 떠올리지만 그때 잠시뿐. 바깥양반에게 설명해봐야 으휴, 저런 철덕 인생... 같은 소리를 들을 뿐이고. 언젠가 유후인노모리를 함께 타고 일본 철도 이야기와 큐슈 역사를 조잘거리는 아들을 보며 엄마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늘 그렇듯, 스크롤 or 손가락을 천천히 내린 바로 당신이 지금 내게 가장 고마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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