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바른 무관심과 지혜로운 관심
새롭게 시작하는 모임의 첫날이면 나는 언제나 긴장한다. 대학입학 후 첫 오리엔테이션일 수도 있고, 독서토론 모임이나, 영어회화 학원일 수도 있고, 대학시절의 동아리 가입 첫날일수도 있다. 이럴 때 보통 모임을 주관하는 사람에게 먼저 통보하고는 한다. “저는 휠체어를 탑니다. 가급적 엘리베이터가 있거나 1층인 공간에서 모였으면 합니다.” 하지만 모임에 앞으로 참석할 사람들이 모두 나에 대해 미리 알 수는 없다(모임 주관자가 참석자들에게 미리 연락을 한다고 해도 이 또한 꽤 어색할 것이다. “우리 모임 구성원 중에 장애인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건가? 관심을 가지라는 것인가?).
내가 긴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사람들은 휠체어에 탄 사람이 이 모임이 추구하는 목적을 수행하는데 잘 적응할지 걱정할 수 있다. 모임의 성격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통상 20대 시절에 모이는 모임에는 본래 목적 이전에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함께 엠티를 가기도 하고, 여름철 해수욕장에 갈 수도 있다. 외부 활동이 많은 모임은 휠체어를 탄 참석자가 생기면 걱정되는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구체적인 이유 이외에도, 보통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전형성, 즉 20대에 대학을 다니는, 여성과 남성이 모이리라는 예측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색함을 느낀다. 물론 이런 어색함은 좀 이상하기도 한데, 당시에는 나도 20대에 대학을 다니는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모임을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선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본다. 통상 21세기 한국의 대학생들이라면 그 이상의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런 맥락에서 ‘예의바른’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예의바른 무관심’(civil inattention)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간혹 ‘예의없는 관심’도 따라붙는다. 지하철이나 식당같이 공적인 장소에서 뚫어져라 휠체어를 바라보거나, 다가와서 이 정도 휠체어는 가격이 얼마정도 되냐고 묻는 사람들의 관심은 때로 공공장소로의 외출을 저어하게 만들 정도다(나는 기분이 좋을 때는 휠체어 가격을 잘 말해주는 편이고 휠체어의 특성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것이라 기대하고서. 하지만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을 때는 그런 질문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이 휠체어는 오천만원이며 한쪽 바퀴가 이천만원이라고 말한다. 질문한 사람은 당연히 그럴 리 없다며 돌아서지만,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저게 가격이 상당한가봐. 정부에서 보조금을 다주지 아마? 세상 참 좋아졌어”).
서로 일정 기간 이상 관계를 맺어 가야 할 모임에서 예의 없는 관심은 드물지만, 이런 경우도 있다. 내 친구는 청각장애가 있는데 그가 모임 등에 가면 가끔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수화로 인사를 한다고 한다. 내 친구는 수화를 제1의 언어로 사용하지는 않고 입모양을 보고 대화를 하는 구화(口話)인이어서 간단한 수화를 할 줄 알지만 능통하지는 않다. 그래도 그는 반가워서 수화로 “수화를 할 줄 아시네요”라고 답하면, 말을 건 사람은 머쓱해하며 갑자기 수화를 멈추고는 목소리를 내면서 “아 인사만 할 줄 알아요 허허”한다고 한다. 그는 심지어 수화로 말을 건 이후 자신이 청각장애인과 대화할 다른 수단(필담을 위한 노트라든가)도 준비하지 않는다. 이 사람의 이 관심은 도대체 무엇일까? 수화로 말을 거는 그는 시혜를 베풀고 있거나, 그저 호기심을 충족하고 있을 따름이다. 영어를 한마디 배우고는 생전 처음 보는 백인 남성에게 다다가 ‘헬로우’를 외치는 꼬마아이와 같다.
이런 예의 없는 관심과 더불어, 사실 앞으로 관계가 지속될 사적인 모임에서는 ‘진정한 무관심’(무시)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존재를 충분히 인지하고서도,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그의 휠체어 같이 특정한 요소에 의도적으로 무관심한 척하는 예의가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을 없는 셈 치는 것이다. 바로 옆에 내가 앉아 있어도, 그 옆에 앉은 ‘여성’에게만 인사를 하는 남성들을 목격한 일은 적지 않다. 특히 모든 사람이 서서 이야기할 때 이 ‘무관심’은 극도로 커진다. 서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비슷한 눈높이의 사람들에게 말을 하기 편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보다 아래에 있는 나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자세를 낮춰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인사를 나누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이럴 때에도, 특별한 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가 대화를 나눌 때, 혼자 1미터 쯤 아래에서 쭈뼛거리며 가방이나 챙기는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자세를 낮춘다. “성함이 원영씨 맞지요? 아 저는 좀 걱정되네요 이야기 나누다 보니까 제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 이름은 000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별함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우선 소외되는 타자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리고는 예의바른 무관심과 관심을 시의적절하게 사용하여 소외되는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는 내가 휠체어를 타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을 때에도, 약간의 놀라움이야 표시할 수밖에 없더라도, 그 이후에는 무관심하다. 모임에서 과잉친절을 베풀지도 않는다. 휠체어를 잘 아는 척, 자신의 동네에도 장애인이 있다는 둥, 수화를 배웠다는 둥 하면서 형식적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모임이 진행되면서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 그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탄 한 사람이 소외되고 있음을 눈치 챈다. 그리고는 그가 통상적인 상호작용방식에는 참여하기 어려워 보임을 깨닫고 비로소 관심을 보인다. 한편 그의 말 가운데 “아 제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라는 내용에 주목해보자. 그는 누구보다 이 모임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한 장애인 참가자에게 저렇게 말을 함으로써, 사실은 당신이 이 모임에 참여하기 힘든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고, 모든 면에서 이 모임에 적응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자신 조차도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게 그는 나를 동등한 상호작용의 주체이자 참가의 자격을 가진 이로 느끼도록 만든다.
나는 사소한 표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저와 같은 표현은 “제 어린 시절에 옆집에 장애인이 살아서 저도 장애인을 잘 아는데요.."로 시작하는 말 보다 훨씬 더 깊은 우정의 가능성을 예고했고, 그 예고는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