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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won May 27. 2016

성스러운 매력

병약하고 추한 몸의 역사는, 예수안에 있을까

비극과 신성(神聖)의 사이 


장애인의 몸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부여된다. 하나는 비극성이다. 장애는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피하고 싶고 넘어서고 싶은 어떤 비극적인 상태와 삶이다. 장애인의 몸은 불행하고 추하고 슬픈 운명을 상징하며, 추함과 불완전함은 때로 악한 것, 악마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태초의 인간 아담은 커다란 키에 대칭과 균형이 완벽하게 잡힌, 통계적으로 인간종에게 요구되는 기본사양을 손실 없이 탑재한 존재였다. 아담은 인간형의 이데아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며, 그 극단에 비대칭적이고 굽은 척추와 머리에 뿔이 난 ‘추한 존재’, 장애인이 있다. 


둘째로, 장애인의 몸은 신성성을 상징한다. 장애가 있는 몸은 그 역경을 딛고 존재하는 영웅적 의미로서 존재한다. 호주 출신으로 사지가 없는 장애를 가진 닉부이치치는 자신의 몸이 희망의 상징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그는 자신의 팔다리 없는 몸으로 타인을 끌어안으며, 삶의 가치와 희망과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한다. 교회에서는 수화로 찬송을 하는 일이 자주 있는데, 이는 대부분 청각장애가 있어 수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예배나 찬송의 내용을 전달하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수화 찬송은 그 자체로 종교적 신성함을 불러일으키며, 장애인에게 부여된 어떤 비극적이고 감동적인 느낌을 촉발시킨다(수화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수화가 이런식으로 활용되는 일이 유쾌할까?).


예수는 섹시함을 경멸했나? 


대하기절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중, 한 아리따운 여성에게 쪽지를 받았다. 나는 “드디어 내가 ‘헌팅’을 당했구

나”라는 생각에 우쭐해지는 마음으로 쪽지를 읽고, 그녀가 나와 가까워지고 싶다며 알려준 연락처로 조심스럽게 연락을 취해보았다. 그녀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 가까워졌다. 그런데 슬슬, 그녀는 내게 교회로 나와보라는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 그녀가 나를 ‘헌팅’한 이유는 내 몸의 성(性)적 매력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성(聖)적 잠재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성(聖)적인 잠재성이 출중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대체로, 장애인을 그 비극성으로부터 구원하는 길이 오로지 영적인 곳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 스스로도 종종 자기 삶의 구원을 자기존재의 신성화에 기댄다. 영웅이 되는 것, 혹은 ‘하나님의 증거’가 되는 것이야말로 자기구원의 유일한 길처럼 보인다. 


가장 감각적인 영역의 하나인 사랑에서도 장애인들은 자신을 구원해줄, 즉 자기 몸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해줄 사람'을 기다리며 자원봉사자나 신실한 종교인의 헌신을 유혹한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니는 여성과 만나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친척 어른들에게서 듣고는 했는데, 그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야말로 내 장애를 감싸고 나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들곤 했다. 영적이고 신성한 관계에 기대서만이 나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성하고 숭고한 사랑과 헌신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듯이 여기는 이 세계에서, 그리고 오직 스스로 그토록 고고하게 장애와 역경을 이겨낸 영웅이 되지 않으면 오로지 비극적 존재로만 여겨지는 이 세계에서, 장애가 있는 나는 이 수많은 형이상학적 구원의 손길이 이제는 지겨울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야한’ 장애인이 되고 싶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 물론 그것이 되고 싶다고 한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야하다’는 말과 장애라는 말을 엮어 나는 그것에 부여된 비극과 신성의 의미를 넘어서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존재, 예수의 언어는 장애를 가진 우리에게 이 형이상학적 구원이라는 그 지루한 언어를 반복할 뿐인가? 나는 신학에 무지하지만, 예수가 만약 저 고상한 하늘에서 굳이 땅으로 내려왔다면 결코 신성의 영역 안으로 장애를 가진 몸을 유배시켜 두는 존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쟁이 예수』라는 책의 저자 박총은, 많은 기독교인이 영적(spiritual)인 것과 감각적(sensual)인 것을 대립적으로 보지만, 그럼에도 예수는 누구보다 감각적 기쁨과 즐거움을 중시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영적인 것과 감각적인 흥분은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말이 옳다면, 예수는 적어도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이 세계의 섹시함을 경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애를 가진 몸은 이제 희망과 영성과 신성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보다는, 희망과 영성과 신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감각적이고 열정적인 세속의 존재로서 먼저 자리매김해야 한다. 


아담은 콰지모도보다 섹시하다. 


신성과 비극의 이분법적 해석을 뚫고 나온 장애인의 몸은 이제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는가. 장애인시설에서 생활하는 내 친구가 신성성에 매달리는 것은 바로 비극의 주체보다는 신성한 주체로 존재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감각과 세속의 의미가 소거된 신성성의 영역에 유폐되어 있기를 거부하라 외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문제를 여전히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 세속세계의 감각에서, 적어도 예수나 아담은 콰지모도(소설 '노틀담의 꼽추'에 나오는 주인공)보다 섹시한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노틀담의 꼽추'에서 콰지모도의 모습.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따르고, 여인들이 다가와 말을 걸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중심에는 바로 예수의 '섹시함'이 있다. 또한 그 중심에는 적어도 그의 자유로운 직립보행능력이 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장애인거주시설에 사는 내 장애인 친구를, 콰지모도를 이 감각의 세계로 끌어내릴 때, 나 자신을 포함한 장애가 있는 몸들은 어쩌면 철저하게 ‘꾸밈없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여기서 우리가 기댈 곳은 없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내 휠체어를 들어 교회 계단을 올려주며 나에게 관심을 베푼다면 구원이 따를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건 반칙이다. 그냥 부딪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적(性的) 매력도 성적(聖的) 매력도 없이, 줄 수 있는 경제적 자원도 한 푼 없이 이 세계와 대면해야 한다. 아마 예수는 두 개의 성적 매력이 모두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랬기에 마구간에서 태어나 가족도 없이 혈혈단신 저 낮은 신분에서도 그는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예수가 감각적이고 영적인 것을 결합한 혁명적 지도자이자 신의 한 형상이었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그것이 충분치 않아 보인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적인 능력은 물론이요 두 가지 성적 매력도 모두 갖지 못한, 그리고 어딘가 불균형하고 불완전하며 일부분이 부재한 몸뚱어리를 가졌던 누군가가, 이 땅에서 감각적이고 영적인 영역을 과감히 횡단하며 사람들의 삶과 영혼과 신체를 구원했다는 어떠한 역사다. 예수가 병자를 구원한 역사가 아니라 말이다. 과연 그러한 역사가 있는가? 또는 그것은 앞으로 쓰일 수 있는가? 장애인의 몸이, 추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몸이, 유약하고 병약하다고 소외당하던 몸이, 신성성과 비극성의 이분법을 초월하게 되었을 때 운신할 수 있는 그 어떤 역사의 공간이 실재한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역사의 가능성을 발견했을 때야말로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비극을 피해 저 신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나의 친구들에게 더 과감한 도전을 주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은, 내게 예수가 그러한 역사의 증거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매력적’이다. 


(이 글은 beminor.com '원영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기고 했던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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