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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won Sep 12. 2016

사랑기회평등법


“나는 당신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떤 이가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상처받을 것이다. 내가 세상과 단절된 채 동굴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다면, 나의 상처는 더 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떤 직장에 취업하고자 할 때, 고용주로부터 “장애인을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자네를 고용했을 뿐이야”라는 말을 듣는다면 (역시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다지 상처받진 않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나의 실력에 자부심과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저와 같이 말하는 고용주에게 당당할 수도 있다. “나는 자격이 있고. 당신은 단지 차별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내가 스스로의 존재에 확신이 있고, 상당한 매력이 있으며, 나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도 누군가 나에게 ‘의무가 있어’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전혀 기쁘지 않을 것이다. 일종의 '사랑기회평등법'이란 법(또는 도덕)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란 애초에 윤리적 의무와 법률규정으로 분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 넓게는 우정을 포함한 한 인간에 대한 호감이란 ‘필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자하는 어떤 이끌림이다. 우리는 상대가 내게 이끌렸다는 사실로부터 나의 존재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커진 나의 존재로 상대를 향해 더 크게 팔을 벌린다. 


이렇게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힘을 우리는 매력이라고 부른다. 매력은 다른 인간적 요소들처럼 애초에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매력은 불평등하게 분배된 외모, 재산, 재능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매력이 무엇인지는 한 사회의 위계질서와 문화적, 정치적 배경에 크게 영향을 받지만, 어쨌든 한 사회는 일정한 매력의 질서를 보유한다. 이 사회에 그야말로 우연히 ‘내던져진’ 우리들은 그 거대한 질서 앞에 맨몸으로 선다. 어떤 존재의 삶이 풍부하고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는 것은 그 존재가 존엄하고 매력적이라는 의미이다. 둘 중 하나가 결핍된 삶은 풍성하지 않다. 


노인이나 장애인들은 잘 정비된 사회보장체계가 있고, 사회구성원들이 전반적으로 도덕적인 사회에서라면 인격적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존엄하다고 여겨지며, 그렇기 때문에 모욕을 당하거나 최저 생계를 유지하지 못해 곤란을 겪는 일이 적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들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이들은 상대방의 호의와 자신이 가진 권리에 의해 일정한 삶을 보장받을지언정 친구들과의 파티, 성적 결합, 사회의 비공식적인 네트워크에 깊이 진입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존중하기 때문에 이들을 배척하지 않고 환대하려 노력하겠지만, 이들과 사적인 감정과 신뢰로 뭉쳐진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퇴직한 노교수를 존중하고 그에게 최선의 배려를 하는 제자들은, 교수를 집에 모셔다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들끼리 편하게 술을 한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반면 매력적이지만 존엄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은 철저히 욕망의 수단이나 대상으로만 여겨진다. 강한 성차별과 가부장적 문화가 유지되는 사회에서 주로 젊은 여성들이 이런 상황에 놓인다. 이들은 어디 가든 자신들에게 모여드는 남자들 때문에 행복과 곤란을 동시에 겪지만(때로는 이런저런 폭행의 피해자도 된다), 어느쪽이든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을 성적으로만 '대상화'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많은 이들은 젊은 여성들을 좋아하지만 그들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성매매여성들일 것이다. 이들은 직업적으로 성적 매력을 이용해 생존하지만 거의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한다. 


매력과 존중은 물론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매력이 없으면 존중을 받기 어렵고 존중을 받지 못하면 매력을 갖기도 더 어렵다. 사회제도와 구성원들에게 일반적으로 잘 존중받는 사람들은 더 풍부한 문화적 경험을 가질 수 있고,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스트레스 없이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그의 신체적, 사회적 매력도 증가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은 교육과 문화, 사회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풍부하게 가지면서 인간적으로 더 탁월한 사람이 되어 더 많은 진실한 존중을 받을 기회가 있다(진실한 존중이란 단지 타자의 매력을 소유하기 위해 그를 존중하는 척하는 가장행위와 구별되는 존중이라고 정의하도록 하자). 반면 존중받지 못하면 매력을 갖출 기회를 더 많이 잃어버리게 되고, 매력이 없으면 사회적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경험과 기회를 갖는데 불리할 수 있다. 


나는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우리 사회의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내가 고교생이던 시절 서울 지하철역에서 엘리베이터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나보다 10여년 윗 세대의 장애인들은 학교에 입학을 신청하면 노골적으로 거부당했으며, 어린 시절만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장애를 이유로 모욕을 겪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장애를 한 인간의 고유성으로 인정하는 인권규범과, 그 규범에 부합하는 여러 법과 제도들을 점점 확립해가고 있다. 수십 년 전에 비해 나의 장애는 더 이상 이 사회에서 노골적인 비하와 유희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존중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선진적인 법률과 사회규범, 교양 있는 시민들의 사회를 만들더라도, 이 모든 것들은 ‘법적, 도덕적 의무감’에 기초한 것이지, 결코 나라는 인간 자체의 존재가 진정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나는 어느 날 수영장에서 그와 같은 생각에 빠졌다. 그곳에서 나는 그저 장애를 가진 ‘괴기스러운’ 몸으로, 수영도 하지 못한 채 버둥대고 있었다. 거기서 나란 존재는 지극히 하찮게 느껴졌으며, 건너편 레인에서 물을 박차며 나아가고 있는 건강한 남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저들은 아마 우리가 전쟁상태에 빠지거나 외계인의 침공, 화산의 폭발 등으로 제도와 윤리규범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될 때에도, 저들이 가진 ‘매력’만으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충분한 존엄을 누릴지 모른다(물론 이들이 노동하고 전쟁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기능적’ 신체라는 점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실제 매력이란 몸의 기능과 분리될 수 있을까?).  

미드 <왕자의 게임>의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라니스터'를 연기하는 배우 피터딘클리지. 이 매력적인 배우의 팔다리가 짧기 때문일까, 그는 아직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적이 없다.

대중문화 속에서도 우리는 (낭만적) 사랑의 주인공으로 ‘아름답지 않은’ 캐릭터를 찾아보기 어렵다. 소설에는 가끔 등장한다.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느의 파반느>에는, 예외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여자주인공이 예외적인 인간인 남자주인공과 만나 사랑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죽은 왕느의 파반느>를 결코 완전하게 영화로 재현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소설의 화자에게 독자가 감정이입하기 위해서는, 아름답지 않다는 그 진술만을 머릿속에 저장해 둔 채 사실은 아름다운 어떤 실체를 마음속에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 주인공은 아름답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에 설명되지 않고 설명되어서는 안 되는 아름다움이 가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감독은 결코 여자주인공을 진짜로 '추하게' 분장시킬 수 없다. 아름다운 여배우에게 엉성한 ‘추함’을 장식하여 등장시킬 수 있을 뿐이다. 관객이 몰입해야하기 때문이다(물론 뛰어난 감독이라면, 진정으로 ‘추한’ 외모를 가진 사람을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을까?). 미국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매력적인 캐릭터인 ‘타이윈 라니스터’를 연기하는 배우 피터 딘클리지는 저신장장애인이다. 그의 놀라운 연기력, 깊은 눈빛과 압도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짧은 팔다리를 가진 딘클리지가 로맨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을 아직은 찾기 어렵다. 


이와 같이, 상대방에게 우리의 매력만으로 '격정'을 불러일으키고, 내가 격정적으로 사랑하게 된 상대방에게 사랑의 응답을 받는 일의 전망은 당신과 나의 경우 그리 밝지 않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상대방에게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이란 정치적 신념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우리 모두는 아름다움에 극도로 취약하기 때문에, 아름다움 앞에서 정치나 도덕은 설 자리가 없다. 도덕적 실천을 위해서 자신이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는 존재와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가진 부, 시간과 열정, 심지어 건강을 세상의 정의와 도덕을 위해 바치는 사람이라도, 결코 사랑의 '정의로운' 분배를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것이 올바르다고 믿기 때문에 널 사랑해" 라고 그가 말한다면, 나는 감동하기보다 상처받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나는 이 행동이 올바르지 않다고 믿지만,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저지를 수밖에 없어"라고 말해주기를 더 원하지 않을까? 


자유로운 사랑과 유혹, 사회이념과 규범, 가부장제 질서가 사라진 평등한 유혹의 장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사랑의 완전경쟁시장에서 매력이 없는 인간들이 설 곳이 있을까? 평등한 존중을 위한 투쟁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매력'을 위한 투쟁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랑을 의무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더 많은 이들이 사랑받을 존재가 되도록 돕는  상호작용의 원칙과  물리적,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할 수는 있다. 타인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한순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긴 시간 겹쳐 그려내는 화가의 초상화처럼 여길 수 있다면, 우리 생각보다 우리 자신은 더 아름다울 수 있고, 타인도 더 매력적일 수 있다.  자유경쟁시장의 전제조건은 공정함이며, 공정한 경쟁을 위한 사회적 개입은 언제나 정당화되어 왔다. '아름다울 수 있는 기회'의 공정한 분배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것이고, 사실 그것자체로 매우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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