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망으로서의 인권 ⑤
크레파스에 ‘살색’이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색깔의 명칭이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에게 차별적일 수 있다며 그 명칭을 바꾸라고 기술표준원에 권고하였다. 이후 살색은 ‘살구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국사회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바로 그 ‘살색’과 유사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고작 크레파스 따위에 많은 사람들의 피부색에 해당하는 말을 좀 쓰는 일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 어린 시절 살색으로 그림을 그리며 자란 아이는, 다른 피부색을 가진 아이를 만나면 “아, 한국사람 다수의 살색과는 다른 색이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의 반응은 곧바로 “왜 쟤는 살색이 검은 색이지. 이상해!”로 이어진다. 살색이라는 명칭은 우리의 피부가 가진 색을 하나로 규정하고 그것에 정상성을 부여한다.
인권이란 본래 국가 또는 해당 영토를 지배하는 주류 정치세력에 의한, 인류차원의 중대한 범죄로부터 개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발전한 개념이다(크리스토퍼 멘케, 『인권철학입문』을 참조하라). 인권이 국제사회의 표준 규범이 된 데에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 기폭제가 되었다. 따라서 국제법적으로 인권침해라는 말은 이슬람국가(ISS)의 잔인한 살해행위나 르완다 내전같이, 국가 또는 특정 영토를 지배하는 주요 정치세력으로부터 발생한 피해에 대하여 주로 사용된다. 크레파스의 색깔로 인권이 곧바로 침해된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도, 또 이론적으로도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잔악한 행위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피부색은 오로지 크레파스의 ‘살색’이라고 굳건히 믿는 아이들의 신념이 특정한 사회 상황과 만나 과장되고 왜곡되면, 그리고 그 아이들이 주류 정치세력을 이루게 되면 곧 '살색이 아닌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과 억압으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에 놓여있는 작은 차별요소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인권의 이름으로 검토해보는 일은 큰 가치가 있다. 이는 결코 '오버스러운' 태도가 아니다. 물론 인권이라는 말을 남용하여 인권이 가진, 다수권력으로부터 소수의 삶을 지키는 날카로운 방어권으로서의 성격이 흐려지는 일은 방지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감수성은 특히 권력과 자원이 없고 수적으로도 열세인 사람들의 일상으로 향해야 한다.
삶에서 꼭 필요하지만 당연하다며 경시되어 왔던, 그러나 권력이 없고 수적으로 열세인 사람들이 주로 경험했던 요소들을 한번 검토해보자. 장애가 있는 나의 한 후배는 그 예로서, ‘오줌권’을 강조한다. 실제로 배뇨활동은 헌법상의 신체의 자유, 일반적 행동의 자유 등에 포함되기 때문에 별도로 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구체적인 행위의 중요성이 잘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줌권’이라는 구체적 언어를 떠올리고 사용해볼 만하다.
단언컨대, 나는 오줌권이 모든 자유의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의 외출은 언제나 ‘접근 가능한 화장실의 존재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 그 장소의 쾌적함, 맛집의 존재 유무, 집에서의 거리는 모두 두 번째 문제다. 화장실이 없다면 우리는 그 장소에 갈 수 없다. 이는 어떤 면에서 수면권이나 식량권보다 더 긴급하다. 밥은 집에서 먹고, 간식을 싸들고 가면 하루를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오줌을 누지 못하면 하루는 커녕 5시간도 버티기 쉽지 않다(물론 최소한의 사회적 존엄을 지키면서 배뇨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존엄을 지키지 않는 '오줌누기'는 이미 많은 장애인들이 경험한 수치스러운 경험의 일부이다. 이로써 우리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결코).
장애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방광염을 포함한 각종 배뇨질환을 앓는다. 늘 배뇨활동을 참아야 할 일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데이트를 하려 해도, 맥주를 마시려 해도, 직장생활을 하려 해도 화장실의 존재는 늘 중요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오줌이 마려운 상황을 떠올려보라. 어떤 로맨스도 오줌권의 보장이 전제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장애인 화장실을 널찍하게 만들어놓는 것이 비용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화장실이 일주일에 한 번 사용되는 경우라도 가장 중대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오줌권은 장애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추석 연휴 펼쳐지는 휴게소 여성화장실의 긴 줄을 떠올려보라. 트랜스젠더처럼 우리가 제3의 성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은 어떤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가? 15세가 넘었지만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들을 데리고 외출한 여성은 어떤 화장실을 이용해야 할까? 이처럼 우리가 ‘사회적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늘 바깥에서 배뇨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반면 중년 이상의 남성들은 (약간의 술기운이 도와준다면) 남의 집 담벼락에서라도 ‘오줌권’을 행사할 수 있다. 약간의 수치심을 감수하면 막히는 고속도로 위 갓길에서도 자유롭다. 이는 생리적 구조의 차이때문만은 아니다. 수치스러움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갓길에서 오줌을 눌 수 없으며, 수치스러움의 양은 평소 받아왔던 존중의 양과 반비례한다. 늘 도움을 받으며 오줌을 참아야 하는 장애인에게는 갓길에서 오줌누기란 장애남성이라고 해도 결코 허용되지 않는 마지막 보루이다(그런데 심지어 장애여성이라면?). 한편, 장애가 없는 남성들이라고 모두 오줌권을 자유로이 보장받는것도 아니다. 우리사회가 만들어놓은 온갓 규범들, 상사와의 긴 회의시간, 노동을 하는 시간동안의 작업장 규율이 우리 모두의 오줌권을 방해한다.
이처럼, 오줌권이라는 말은 우리가 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생리활동의 중요성을 부각하며, 그 생리활동의 자유조차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크레파스를 살색이라고 부르는 일, 화장실을 남녀로 분리하여 설계하는 일처럼 사소하고 ‘별것 아니게’보이는 일들에 차별이나 권리라는 말을 붙여보는 일은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한다. 날카로워진 우리의 감각은 지금 이 땅을 살아가지만 우리 눈앞에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평화를 위협받고,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이념에 물들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그 에너지가 잔악한 인권침해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소중한 토대가 된다. 수많은 회의주의적 의견에도 불구하고 인권의 가치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