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망으로서의 인권 ⑥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는 거대 기업의 천연가스 발굴작업을 위해 작은 마을에 파견된 컨설던트 스티븐(멧 데이먼)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가스 발굴을 통해 농장일로는 절대 벌 수 없는 금액을 받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도 제공할 수 있음을 농장을 가진 주민들에게 설득한다. 스티븐 역시 농장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린 시절 힘든 삶 속에서도 헛간을 정성스레 관리하던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농장주들에게 땅 밑의 자원을 발굴해야한다고 설득하는 일은 진심이었다.
가스발굴에 찬성할지 여부를 다투는 투표를 앞두고 환경운동가까지 가세한 가운데, 스티븐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려 노력하다 마을에서 만난 과학교사 엘리스와 가까워진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서 식물을 기르는 일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말을 들은 스티븐은 과학교사가 도대체 왜 그런 걸 가르치는지 웃으며 묻는다. 그러자 엘리스는 말한다. “농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그저, 무엇인가를 돌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거지요.”
영화는 반전을 겪으며 전개되지만, 결국 스티븐은 할아버지가 왜 그리도 자신과 함께 매달 페인트를 칠하며 낡은 헛간을 소중히 다뤘는지를 깨닫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으로 나아간다. 스티븐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 할아버지의 헛간을 언급하며, 그가 아마도 “무엇인가를 돌보는 방법을 가르치려했던 것 같다”고 술회한다.
나는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돌봄’을 받았다. 다수가 그러하겠지만 어린 시절은 할머니와 부모님의 돌봄 속에 컸다. 다만 대개의 아동들이 자유로운 운동신경과 근력을 가지게 되면서 점점 돌봄이 불필요해지지만 나는 좀 더 오랫동안 더 많은 영역에서 돌봄을 받아야 했다. 별다른 편의시설이 없는 시골 화장실 덕분에 열 살이 넘도록 배변을 위한 돌봄을 받아야 했고 목욕을 스스로 하기도 어려웠다. 어린 시절을 방에서 홀로 보내야 했던 나는 아동 우울증을 앓았고 어머니의 절대적인 정서적 돌봄에 의존했다.
반면 내가 돌봄을 제공하는 일은 드물었다. 나는 작은 식물하나 제대로 길러본 일이 없다. 어린 시절 강아지를 사랑했지만 그들에게 밥을 준건 나의 할머니였다. 이제는 돈을 벌어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부모님의 생계비를 상당부분 보전하거나 나보다 장애가 중하여 더 많은 돌봄이 필요했던 친구에게 약간의 후원금을 내기도 했다. 이것도 물론 넓은 의미에서 돌봄이다. 하지만 물리적 정신적 제약 하에 놓인 사람을 위해 나의 신체와 마음을 집중시켜 그에게 필요한 돌봄을 제공해본 일이 드물다. 이는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동차의 엔진오일을 점검하고 세차를 하는 일은 세차장이나 카센터의 몫이다. 반면 나의 아버지는 내 차를 만날 때면 직접 목장갑을 끼고 차의 구석구석을 꼼꼼히 손본다.
돌봄을 정의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돌봄을 정성을 들여 내가 아닌 타자(사람일 수도, 동물일 수도, 물건일 수도 있다)의 필요를 살피고 이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돌봄이 좀 더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돌봄을 제대로 배우지는 못한 셈이다. 여기에는 나의 게으름과 무관심이 물론 큰 몫을 했을 것이지만, 한국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남성이라는 사실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돌봄노동’은 여성의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른 한편 21세기 대한민국은 엄청난 인구밀도와 지칠 정도의 수많은 관계들, 무수히 많은 자원들로 넘치는 시대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간편하게 관계와 사물을 다른 관계와 사물로 대체하는 일의 편리함을 잘 안다. 따라서 정성들여 무엇을 돌보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정성들여 돌볼 일이 없으므로 타인과 사물의 고유성을 포착하는 경험도 낯설기만 하다.
한 중학교 내 유휴 건물에 발달장애인을 위한 직업능력개발센터 설치를 놓고 부모들이 대치했다. 중학교 학생들의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발달장애인들을 절대로 근처에 둘 수 없다고 외친다. 이들은 “우리는 발달장애인을 혐오하지 않는다”면서도, 그들이 아이들 근처에 있는 일은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발달장애인들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최소한의 직업을 가지고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반대하는 이들에게 호소한다.
두 부모들은 모두 자신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최선이라고 믿는 행위를 실천중이며, 이 문제를 간단한 님비현상으로 축소하는 일은 부적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비정상적’이고 ‘특이한’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켜 정상의 세계 안에서 길러내는 일만이 진정한 ‘돌봄’일까? 우리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누군가를 돌보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많은 경우 상시적으로 누군가에게 돌봄을 요청하는 존재이며, 돌봄을 받을 권리를 지닌 존재다.
발달장애인직업능력센터가 아이들의 교육장소와 가까운 곳에 설치된다는 일이 반대의 핵심근거이지만, 오히려 공간적으로 가까운 이점을 이용해 더 많이 교류하여 얻을 교육적 장점은 없을까? 특별한 질병이나 장애가 없다면 사춘기 학생들은 조만간 커다란 신체와 막대한 에너지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돌봄의 의미와 기술’를 배우지 못할 때, 각박한 사회적 경쟁과 좌절을 만난 이 신체성과 에너지는 어디를 향하게 될까?
나는 이 시리즈를 ‘열망으로서의 인권’이라고 이름 붙였다. 인권이라는 말에 부여되는 시혜와 배려 같은 낭만적 태도와 인권에 대한 제한적 해석을 거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권이 우리 인간의 신체적 자유와 에너지로 타인을 학대하거나 폭력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인권교육의 핵심은 결국 무엇인가를 돌보는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취약해보이고, 달라 보이고, 특별한 돌봄이 요청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를 배우는 일의 가치는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다. 누군가는 실제로 발달장애인들이 위험한 경우도 있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 세계에서 위험한 일을 일으키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라. 돌봄이 필요한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튼튼한 신체와 명민한 정신,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젊은 인간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