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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 Mar 02. 2022

'서툰서점'의 마지막 날

격리 후 첫 날. 성공적인 하루. 

우리는 둘 다 비장했다. 오늘은 꼭 좋은 하루를 보내야만 한다고 잔뜩 다짐했다. 그러니까.. 어제로 격리가 끝났고 백군과 나는 8일 만에 얼굴을 봤다. 격리기간 동안 느끼는 게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느낀 건 '지금 당장 주어진 시간을 잘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마치 인생에 새 날이 주어진 것처럼 오늘을 살기로 백군과 나는 똑같이 결심했다. 어디든 아주 작은 이벤트만 있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 작은 이벤트를 찾다가 오늘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 '서툰서점'을 발견했다. 나는 무슨 일이 전부 끝나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 같을 때 선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프로젝트가 끝난 후 팀원에게 라던지, 졸업하는 날 선생님에게 라던지... 그런 맥락에서 '서툰서점'에 가고 싶었고, 그 서점이 하필 좋아하는 춘천에 있었다. 비 오는 날은 꼭 춘천의 공기가 생각나는데 마침 오늘 아침 비가 와서 공기가 촉촉했다. 춘천에 있는 '첫 서재'의 포스팅으로 오늘 아침에 알게 된 '서툰 서점'엔 아무런 인연이 없었지만 왠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기분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여행을 가면 보통 백군은 운전을 하고 나는 음악을 고른다. 한바탕 까불고 떠들다 서울을 벗어났고 춘천에 가까워져서야 첫 음악을 틀었다. 첫곡은 의식의 흐름대로 '춘천 가는 기차'였다. 익숙한 멜로디의 시작과 함께, 이 곡에 링크된 기억들이 사정없이 흘러들었다. 춘천은 대학시절 혼자서 카메라를 들고 자주 여행했던 곳이고, 신기하게 갈 때마다 비가 왔고, 갈 때마다 꼭 이어폰으로 춘천 가는 기차를 들었던 곳이다. 그때는 실제로 기차를 타고 도착해선 아무 버스나 타고 아무 곳에나 내려 느린 걸음으로 목적지 없이 어슬렁 거리며 사진을 찍다가 뜻밖에 보석 같은 풍경들을 만나곤 했던. 그러니까.. 행복한 기억만 잔뜩 남기고 사이좋게 헤어진 x남친을 남편과 함께 다시 만난 기분이랄까. 

춘천가는 기차를 시작으로 김현철의 '봄이 와'를 선곡했다. 설레는 전주 부분과 함께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던 중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안 좋은 것은 눈 뜰수가 없네~ 눈을 뜰수가 없네'하는 노랫말에 마침 코너를 돌면서 정면으로 비치는 햇빛 때문에 정말 눈을 뜰수가 없었다. 우리는 마치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부신 연기를 했다. 다음 곡으론 아끼고 애정 하는 '윤상'의 '사랑이란'을 듣고, 줄줄이 그 시절 사랑하던 가수들을 소환했다.  


오늘이 마지막인 '서툰서점'은 예상대로 좋았다. 주문한 연유라떼도 맛있었고, 책마다 깨알 같은 손글씨로 소개해둔 단정한 글씨를 읽는 것도 좋았다. 분명히 춘천에 살았다면 단골이 되고도 남았을 곳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마운 장소가 되어주었을까 생각하니 마지막 시간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가득 찬 마음으로 서점을 나와서 우리는 청평사에 갔다가 서점에서 추천받은 춘천 닭갈비를 먹고 집으로 오는 내내 음악을 듣거나 열정적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세상에서 제일 뻔한 루트로 춘천을 여행하고 집에 오면서 우리는 여러 번 '행복'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그러니까, 백군과 나는 결심했던 대로 오늘을 정말 잘 살았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온전히 음악을 들었고, 책을 읽을 때는 온전히 작가와 만났고, 청평사를 향해 걸을 때도, 닭갈비를 먹을 때도 그 순간에만 있었다. 과거와 미래를 뛰어다니며 후회하거나 걱정하는 마음 없이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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