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께서 한 청년에게 물으셨다.
"뭐 하는 사람이오?"
청년은 대답했다.
"연기 공부합니다."
할머니께서 다시 물으셨다.
"아, 연기를 배우는 청년이군. 요즘엔 뭘 배워요?"
청년이 대답했다.
"어... 그게... 말씀드려도 이해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청년의 대답에 할머니는 지체 없이 대꾸하셨다.
"그렇지 않아요. 나도 연기에 대해 좀 알아요. Lee Strasberg의 Method에 대해 배우나? 아니면 Meisner의 테크닉? Michael Chekov? 그것도 아니면 Stanislavski?"
청년은 잠시 당황했다.
"혹시 배우세요? 아니면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이세요?"
청년의 물음에 할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그럼 어떻게 Method에 대해 아세요?"
각자의 버스가 올 때까지 둘은 '연기'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위의 이야기는 제가 아는 분이 뉴욕에서 American acting method를 공부하셨을 적에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타이틀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위의 이야기를 듣고 참 부러웠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 대중들이 전문적인 것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조금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야에 대하여 대중들이 전문성을 가진 다면, 그 분야의 기본 퀄리티는 상향 평준화가 되는 경향이 나타날 것이고, 그로 인하여 그 분야는 더욱 좋은 퀄리티의 결과물을 내놓는 사람을 찾으려고 끊임없는 시도와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만으로도 그 분야는 상당히 활발하고 건강한 움직임들을 가지게 되겠죠(물론 이러한 것으로 한 분야의 시장이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위의 이야기가 참 부러웠습니다. 물론 한 사람의 경험만으로 그것을 일반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라는 분야에 있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결과물의 퀄리티를 생각했을 때, 일반화의 반쪽 정도는 될 수 있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기'는 우리의 삶과 아주 깊은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기'라는 학문 자체는 사람과 삶에 대해 아주 깊고 넓은 이해를 요하죠. 즉 인문학적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깊이와 넓이는 결코 얕지도, 좁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오하기만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만으로 만들어진 학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죠. 그리고 우린 이것을 통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조금은 따분한 질문일 수도 있는 것들에 생각보다 아주 쉽게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말'
Method acting(메소드 연기)에 있어서 '말' 자체는 '구구단' 정도의 것입니다. '구구단'은 이미 우리 머릿속에 기호화되어있습니다. 떠올리면 그냥 뱉을 수 있는 것이죠. 9 곱하기 9가 81이란 것을 굳이 9를 아홉 번 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구구팔십일'이라는 단순한 기호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도 이와 같은 거죠. 9를 아홉 번 더하는 과정을 '내적인 느낌'이라고 한다면, '구구팔십일'은 '내적인 느낌'을 나타내는 기호일 뿐입니다. '말'은 '내적인 느낌을 문자로 나타내는 기호'라는 것이죠. '구구팔십일'은 절대 9를 아홉 번 더하는 과정이 될 수 없습니다. '말'은 '내적인 느낌', 즉 본질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오'라는 부정적인 기호가 적혀 있는 대본을 보고서도 긍정적인 '아니오'를 뱉을 수 있는 겁니다. 또는 '운다'라는 기호를 가지고 '웃으면서 우는' 연기가 가능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이해를 가지지 못 한 어떤 배우들은 부정적인 기호를 마주하면 그저 부정적인 연기를 하고, '화를 낸다'와 같은 기호를 보면 그저 화만 내기에 바쁜 연기를 하며, 긍정적인 기호를 마주할 때면 긍정적인 느낌만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역할의 삶'이 가진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연기를 하는 거죠. 그런 순간엔 그저 기호와 그 기호가 마치 본질인 것처럼 꾸미는 어떤 것만이 있는 겁니다. 이런 연기를 보고 '연기가 이상하다'라는 느낌을 받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죠. '표현주의', '부조리극', '서사극'과 같이 '사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 장르의 연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사실주의 연기'를 보이려는 것이라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이 '연기'라는 학문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이미 알아버린 우린 내 '말'과 내 옆에 있는 사람의 '말' 속에서, 그리고 연기하는 사람의 '말'에서 그것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게 될 것이라는 거죠.
'연기'라는 학문은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실용성을 가진 인문학적인 접근들 투성이 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연기'는 '한 사람의 삶을 창조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것이 '배우'에게는 '한 사람의 삶을 창조하는 일'에 필요한 것이겠지만,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을 창조해 나아가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이죠. '말'을 잘 하고 싶다면 '말'이 가진 본질을 이해해야 하고, '행동'을 잘 하고 싶으면 '행동'이 가진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내 '감정'에 솔직하고 싶다면 '감정'의 본질을 알아야 하며, '상처'를 치료받고 싶다면 '상처'의 본질을 알아야 하겠죠. '연기'라는 학문은 결국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고 공부입니다. 그리고 더욱이 추상적인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내가 직접 하면서 느끼는' 것이 '연기'입니다.
우린 삶 속에서 나름의 '연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열 받게 하는 상관 앞에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자식 앞에서 일은 고되지만 괜찮은 척하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고 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것들 말고도 정말 많은 '연기'를 하면서 살아가죠. '연기를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리고 그 '이해'는 '난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최소한의 방향성, 혹은 그 이상을 알려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기'를 접했으면 합니다. 언제 어디선가 지나치는 사람과 '연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