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수소녀 May 31. 2024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다시 읽으니

문학동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1,2권


어린 시절 아빠의 손만 거치면 제 글은 새 옷을 입곤 했어요. 학교 글쓰기 숙제를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해 빈 공책만 펼쳐놓고 밍기적 거리고 있으면, 아빠는 몇 자 안되는 제 글을 쭉쭉 긋고 아예 새로운 글을 써주시곤 했지요. 날림체인 아빠의 글자를 알아보는게 어려워 엄마나 아빠에게 물어 한 글자씩 떠듬떠듬 옮겨적는 일이 제 일이었어요.


아빠가 써주신 글들로 탔던 상 중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독후감으로 받은 상이 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아빠 회사에서 직원 자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회의 상이었지요.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걸 초등학생이 썼을 리 없다며 틀림 없이 서차장님이 써줬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해요. 아마도 아빠는 우리 딸이 쓴 거라고 허허실실 웃었을 것이고, 그 글은 버젓이 사보의 한 페이지에 실렸답니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은 이전엔 접해도 그게 무엇인지 몰랐던 것들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죠. 그 시절, 읽어도 그 의도를 다 알기 어려웠던 책을 이번에는 너무나 큰 감동으로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흑인 노예를 다룬 이 소설이 절대 그 때 그 곳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쩌면 주제만 달라질 뿐 우리 인간과 사회가 겪어왔던 문제들을 그대로 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죠.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배경은 1850년대, 미국 남부에서 흑인 노예를 사고 파는 것이 합법이던 때였지요. 주인공 톰은 남부의 관대한 주인인 셸비씨 집안의 충직한 하인이었어요.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노예를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주인 밑에서, 그는 주인집에 딸린 별도의 오두막집에 살며 가족들과 평온한 일상을 꾸려가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셸비씨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그는 가족과 헤어져 다른 집에 팔리게 돼요. 다행히도 처음엔 좋은 집으로 팔리고 몇 년 후 주인에게 자유의 몸이 될 것을 약속 받기도 했지만, 주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없던 일이 되고, 극악한 새 주인에게 팔려가 괴롭힘을 당하다 거기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듯 노예는 언제든지 사고팔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때로는 자비로운 주인 밑에서 안정적인 삶을 누리기도 했지만 그건 본질적인 자유는 아니었지요. 재산 가치 그 이상이 아니었으므로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중 하나씩만 떼어 다른 곳에 팔아넘기는게 얼마든지 가능했어요. 몸이 탄탄하고 일을 잘 하는지에 따라 상품 가치는 더욱 올라가기 마련이었고요. 그들이 고분고분한 상품으로만 있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도 백인들과 같은 감정을 지닌 인간이었기 때문이었지요. 혹독한 취급을 받으면 분노가 올라오고,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의 실제적인 고뇌를 지닌' 사람이요. 때문에 그들은 참혹한 현실 앞에 절규했고, 뜻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형벌이 내려지곤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노예 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그에 관련된 여러 입장을 들을 수가 있지요. 먼저는 기독교 정신 위에 세워진 미국이란 나라에서 사람을 사고 팔고 그들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는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세상이 꼭 그렇게 돌아가던가요? 목면산업이 기반이었던 그 지방에서는 산업을 받쳐줄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노동력은 200여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흑인 노예들의 것으로 채워졌지요. 이익을 유지하고 늘리기 위한 사업가들의 로비와 그것을 대변하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을테고요. 때로 그래선 안된다고 걱정하는 아내에게, 이건 개인적 감정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일이라고 힐난하는 남편의 말은 이 문제를 바라보는 당시 미국인들의 입장 차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작가는 이 제도가 없어지지 않는 것이 단순히 정치적 결정이나 산업적 환경 때문이 아닌, 이에 대해 모른 척 하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해요. "이런 식으로 조직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명예롭고 인도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게 뭐겠습니까? 될 수 있는 한 눈을 감고 마음을 무감각하게 하는 수 밖에는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런 잔인한 방식에 물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뿐이에요." 라고 말한 톰의 두 번째 주인처럼요. 자기가 속한 '계층' 안에서의 불이익, 부정 등의 문제들에는 지나치리만큼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한 다리 건너 같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매섭게 무관심했던 그때 사람들의 모습은 어쩌면 지금 우리 모두의 모습은 아닌지요.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흑인 노예들의 본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톰은 보기 드물게 정직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많은 노예들은 그렇지 않았던가봐요. 강제적으로 자식이나 남편을 잃은 슬픔으로, 혹은 어릴 때부터 숱한 매질을 당했던 아픔으로 많은 이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의지를 상실하고 살아갔지요. 모든 면에서 짐승처럼 취급 받은 그들은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밑바닥까지 떨어져 거의 짐승처럼 되어버렸는데, 그것은 백인들이 그들에게 더 가혹하게 할 명분이 되기도 했어요. 그들은 흑인이기 때문에 폭군이 되었던 것일까요, 종족과는 상관 없이 노예이기 때문에 폭군이 되었던 것일까요?

이러한 참상들 속에 흑인 노예들은 과연 신이 계시는지 부르짖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톰의 신앙도, 죽음이 가까운 상황에도 이어진 무자비한 발길질 앞에서는 갈등을 겪지요. 그러나 톰은 결국 그 와중에도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을 멈추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며 기쁘게 천국으로 떠나가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톰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지요. 톰이 떠나온 집의 젊은 주인의 귀환, 새로운 집에서 만난 동료가 오래 전 헤어져야 했던 어린 딸, 그리고 또 다른 인연들까지.. 지난 모든 사연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장면에서는 누군가가 떠난 이후에도 모든 것을 지켜보며 만남을 주관한 작가의 섭리에 환호와 경탄, 안타까움의 눈물을 마지 않게 되는 것이죠.


제가 대학에 원서를 넣을 때 아빠는 성치 않은 몸으로 학교마다 입학 상담을 다니고, 딸을 보내고 싶은 학교에 열 몇 번씩 찾아가 지나가는 재학생들을 붙잡고 논술과 면접 문제가 뭐였는지 물으셨었어요. 입학 논술 시험을 치고 온 날, 쓰고 나온 글의 전개를 얘기해 드리자 사뭇 놀라시며 "네가 아빠를 닮았나보다" 했었지요. 그런 아빠에게 이제는 나도 스스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이런 생각들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다고 얘기해 드리고 싶어요. 톰 아저씨의 죽음 이후에도 남은 자들에게 이뤄진 섭리가 있었던 것처럼, 아빠가 천국에 간 이후에도 우리는 아빠의 사랑과 생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갈 것이라고도요.


그리고 스토우 부인, 정말 훌륭한 소설을 쓰셨네요. 저의 부족한 글이 이 책이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데에 조금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살고 싶은 집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