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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소녀 May 29. 2018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성시대>를 다시 만난 날

아빠가 아픈 날이 길어지고, 매일 '정상적'으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신 후 엄마는 일을 시작하셨다. 매점을 찾은 손님들에게 라면을 끓여주는 일이었다. 남동생의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운영하던 매점은 빌딩 지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아침을 미처 먹지 못하고 출근한 주변 회사의 사람들이 라면이나 김밥 등을 찾아 오는 곳이었다.

결혼 이후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엄마가 일을 시작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들과 같은 반 여자애의 엄마가 고용주인 상황에서는 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민감해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승진가도를 달리다 한창 나이에 꺾여버린 아빠 대신, 아빠와 같이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우리 가정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뭐든 시작해야했다.

새벽기도 후 부지런히 아침을 차려놓고 출근하던 엄마는 세상에 열심히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아침에 매점을 찾는 손님들의 대다수는 집이 멀어서 아침 여섯 시도 전에 집을 나온다며 말이다.

손님들 중에 기업은행 직원이 있었다. 어디서나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엄마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손님이 좋아하는 것을 몇 번 챙겨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고마워하던 손님이 매달 우리집에 조그만 우편물을 보내왔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의 사연들을 묶은 <여성시대>라는 조그만 책자였다. 기업은행의 협찬으로 만들어지기에 기업은행에 가면 비치되어 있던 작은 월간지였다.


읽을거리를 찾아 집어든 책 속에는 갖가지 사연들이 있었다. 세상엔 어쩜 그리도 각양각색의 삶의 이야기들이 있는 것인지. 어떻게 그런 일들을 겪어왔을까 싶은 기막힌 사연부터, 소박한 것에 감사하며 알콩달콩한 행복을 만들어가는 사연, 군대에서 보내온 군인들의 이야기까지 제각각의 작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 이웃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어떤 글은 읽으며 마음이 찡해왔고 어떤 글은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책을 즐겨 읽지 않던 엄마는 그 책자 만큼은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열심히 읽곤 했다. 나도 그 책이 참 좋아서 매달 여성시대가 배달되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그 책자를 읽으며 땀과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삶이 있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주변에 참 잘난 사람 많던 환경 속에서 우리 가족만큼은 어려운 시간을 지나가던 때, 엄마와 나는 여성시대 속 이야기들을 읽으며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 받고 힘을 내었다. 어쩌면 우리보다 못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많다며 얻은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만나던 따뜻함과 소박한 재미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를 웃고 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때쯤 부터였을까 아님 원래부터였을까. 나는 번지르르하고 화려한 것 보다는 부족한듯 보여도 소박한 삶의 이야기들에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엄마도 그 직장을 그만두신지 오래이고 우리집은 이사를 가서 여성시대를 더 받아볼 수 없었다. 나는 학교 졸업과 취업을 했고 결혼 후 작은 아기의 엄마가 되었다. 십수년의 시간이 흐른 후 동네 도서관에 들렀다가 여성시대 책자를 다시 만난 날, 나는 얼른 집에 돌아와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한 손으로 여성시대를 들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번 5월호는 '나의 첫 집'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신춘편지쇼 묶음이었는데, 다양한 사람들의 '첫집'에 대한 추억과 사연들이 줄줄이 이어져나왔다. '첫집' 이라는 한 가지 단어에서 어쩜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가슴 속 이야기들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는 인생 실패 후 얻은 고시원 방 한 칸이, 누군가는 아픈 부모와 헤어진 후 동생과 함께 자라난 고아원이 그들의 첫집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차가 수직으로 올라가야 도달하는 꼭대기 빌라에서 일곱식구의 행복을 꽃피우고, 어떤 이는 동생의 사고 보상금으로 첫집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20년이 지나서야 처음 입 밖에 꺼내본다고 했다. 나도 결혼 후 우리가족의 첫집에 대해서 쓴 적이 있었지만, 순탄하고 평범하게 첫 집을 마련해간 나의 이야기는 감히 그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신춘특집이라지만 글솜씨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 있던 사연들은 대단한 작가가 틀을 잡아 써내려간 소설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 존재하는 투박하지만 진실한 이야기들이었다. 맞아 그게 내가 여성시대를 좋아하던 이유였다. 세상의 어떤 것이 열심히 묵묵히 쓰린 하루를 살아내는 한 사람의 삶보다 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멋을 낸 어떤 감성적인 글보다도 눈물과 웃음의 흔적이 담뿍 들어있는 작은 편지글이 더 와닿는 이유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런 이들이 훨씬 많을게다. 사람들은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보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려 애를 쓰지만, 세상의 빛나고 높은 것들 바깥에는 쉽사리 인생이 풀리지 않아서 눈물 짓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게다. 우리 아기에게도 그 진리를 잊지 않고 들려주어야지. 다시 여성시대를 손에 잡은 날, 나는 잊고 지내던 친구를 다시 돌아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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