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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Apr 05. 2024

예술가로 태어나 노동자로 성장하며

초등학교 들어가면 다 끝이야

"너네, 초등학교 들어가면 다 끝이야. 학교에서도 계속 공부만 해야 하고. 학교 끝나면 학원 가야 되고. 집에 와도 숙제해야 돼. 지금이 좋은 줄 알아. 곧 있으면 다 끝이야."


"..."


열 살 형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동생들의 표정이 사뭇 슬프다. 자기 보다 네 살 먼저 산 형의 호소가 꽤나 진정성 있게 느껴졌는지, 다시 엄마 뱃속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많이 놀리는 편인데도 큰 애는 K 어린이의 삶이 버겁다. 유치원 다닐 때 종일 놀기만 하다가 갑자기 쉬는 시간 10분에 계속 공부만 하라는 학교도 힘들고, 일주일에 한두 번 가는 학원과 얼마 되지 않는 숙제도 너무나도 힘들다. 사방으로 날 뛰며 놀기만 하던 모글리를 공부와 숙제로 길들이는 과정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본능을 역행하는 공부와 숙제는 큰 애에게 물리쳐야 할 주적이 되었다.


내 뱃속에서 나온 생명체가 모든 것이 즐거운 아이의 시기를 지나 불행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엄마는 생각이 많아진다. 배움이 없는 동생들은 그저 행복한데, 이제 긴긴 교육과정의 발을 뗀 애는 이토록 괴로운걸 보니, 인간은 (비자발적) 학습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불행해지는 게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지식과 행복을 등가교환하며 즐기는 삶에서 견디는 삶으로 이끄는 12년 간의 교육 과정. 모든 것이 경이로웠던 예술가를 그 어떤 것도 흥미롭지 않은 노동자로 만드는데 이 보다 더 최적화된 환경이 있을까?


하루는 수학 문제집 푸는 걸로 큰 애와 실랑이를 벌였다.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니 하루 두 장씩 수학 문제집을 풀자는 엄마의 제안은 자주 이행되지 않은 채 무시당했다. 누구네 애들처럼 교과 과정 학원에 사고력 수학 학원까지 다니라는 것도 아니고, 문제집 두 권을 각각 세 장씩 풀라는 것도 아니고 단 두장, 최소한의 공부라도 하자는 건데 그걸 안 한다. 며칠 째 게임에 몰입하느라 문제집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이와 엄마 말을 똥으로 듣는 거냐며 소리 지르는 나. 하지 않으려는 자와 하게 하려는 자의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지던 어느 날, 하지 않으려는 자가 선방을 날렸다.


"왜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해요?"


"하기 싫은 것도 할 줄 알아야지!"


"왜요?"


"엄마 봐. 회사 가기 싫은데도 가자나!"


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 삶을 시작하는 아이에게 먼저 산 어른으로서 한다는 말이 고작 이런 말이라니...  별로다. 너무 별로다...


'일을 할 때, 살아 있는 거 같아요!' 라며 눈을 반짝이는 어느 드라마 속 여주처럼 아이에게 자기 일을 사랑하고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는 멋진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실상은 녹록지가 않다. 정시퇴근을 위해 휴식도 없이 폭풍 질주하는 일도, 사내 정치와 파워게임에 밀려 진급에 누락되는 상황도, 아침마다 피로한 몸을 이끌고 만원 지하철에 몸을 던지는 일도... 남의 돈 벌기와 조직생활에서 살아남기는 나 같은 범인에겐 극복하기 어려운 피로였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아침마다 힘겨운 발걸음으로 출근하는 가장의 모습을 성실한 무기징역수라고 표현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의 현실도 멋진 커리어 우먼의 삶보다는 성실한 무기징역수의 삶에 가까웠다. 꾸역꾸역 버티며 인내하는 스스로가, 피로에 절은 거울 속 나의 모습이 때론 애처로웠다.


 가끔 나는 아이들을 보며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어른인 나는 이토록 삶이 피로한데,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나고 신기한지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치며 낄낄댔다. 무(無)에서도 재미를 찾아내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왜 니체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경지를 최고의 경지로 삼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라고 다 같은 아이가 아니었다. 공부를 시작하지 않은 아이와 공부를 시작한 아이는 차이가 있었다. 공부라는 삶의 작은 숙제를 부여받기 시작한 큰 애가 힘들어하는 하는 모습을 보니, 나는 어른의 삶이 버거운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어른에게는 아이들보다 더 많은 삶의 숙제가 부여되니 말이다.


 어쩌면 어린아이가 예술가적 기질을 보이는 것은 환경이 만든 결과 일지도 모르겠다. 별다른 삶의 의무 없이 오로지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기. 오감에 집중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기. 뭘 먹고살지에 대한 걱정이 없는 세상 태평한 시기. 아이의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가적 감성은 부모의 경제적, 정서적 지원이 전제될 때 가능한 잉여로움의 산물은 아닌지. 어른이 아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어려운 것은 어른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로 태어나 노동자로 성장하며 삶의 과제는 훨씬 더 무거워졌다. 더욱이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밥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면 밥벌이의 무게가 모든 걸 압도했다. 그 좋은 재미를 뒤로 하고, 돈을 주는 체제에 나를 끼워 맞출 만큼이나 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는 개인의 흥미나 관심사를 고려해 주고 각자의 재능이 꽃피는 때를 기다려 줄 만큼 친절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시장의 수요를 창출하는 것보다 시장의 수요에 맞게 나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부를 축적하는 빠르고 안전한 방법임을 나는 체제하에 살며 익혔다.


 그저 밥만 잘 먹어도, 아장아장 걷기만 해도 궁디 팡팡을 했던 시기를 지나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면, 부모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매트릭스의 진실을 말해야 했다. 네가 그동안 살아왔던 세계는 진짜가 아니라고. 엄마 아빠가 일시적으로 만들어준 온실일 뿐이었다고. 온실 밖의 세상은 약육강식의 룰이 지배하는 야생이라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한 준비를 이제부터 해야 한다고. 하기 싫은 공부도 하며 시장이 요구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야생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으니, 야생의 생존에 유리한 일을 할 수 있는 노동자로 성장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나는 과연 삶을 시작하는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예쁜 눈을 반짝이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노래하는 너희도 자라면서 점점 재미있는 것이 줄어들고, 더 이상 그 무엇도 재밌지 않은 무기징역수의 삶을 살게 될 거라고 말해야 할까? 초등학생도 힘들다는 아이에게 중학생이 되면 힘들고, 고등학생이 되면 더더 힘들고, 취업은 죽을 만큼 힘드나 이후엔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해야 할까? 성실한 노동자로 평생을 사신 부모님이 은퇴 이후에도 노인 빈곤에 대한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며 나는 더욱 삶이 어려워졌다. 영화 '쇼생크탈출'에 나오는 장기징역수들처럼 감옥의 삶에 길들여져 스스로 자유를 체념한 채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주인공 앤디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않고 집념과 끈기로 탈옥을 꿈꿔야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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