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 한주 기행>
해외를 떠돌던 시절 누군가가 내게 한국이 그립지 않느냐, 그립다면 뭐가 그립냐고 물었을 때 백이면 백 한국 가서 술 마시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만리타국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온갖 술들을 마시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한국의 술을 마시고 싶다고 대답했던 건, 술 깨나 유명하다는 여러 동네들 중 그 어디에서도 밀주가 아닌 이상 한주(韓酒)처럼 제대로 된 비살균 생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떠나기 전과는 사뭇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양조장이 늘면서 술도 엄청 늘었다. 물론 한주가 가진 강점과 매력이 있으니 새로 이 분야에 뛰어드는 사람도 늘고 한주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날 거라고는 예상하기는 했지만, 불과 3~4년 만에 이 정도로 많아질 줄은 몰랐다. 한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근사한 주점도 많이 생겼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지역 특산주로 지정된 술에 한해서 인터넷 판매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내내 집에만 처박혀 있던 나도 제법 사서 마셨다.
미생물들이 그대로 살아 있는 생주(生酒)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한주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살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술이 가진 복잡하고 오묘한 맛과 향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은 이미 그것을 죽여 버린 다른 술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비살균이 무조건 술맛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생주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맛과 향의 균일성을 유지하는 것부터가 어렵고 유통 또한 쉽지 않다. 엄선된 재료와 물로 섬세하게 발효를 다루어 빚어낸 프리미엄 한주를 콜드체인 방식으로 배송받아 마실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다. 이쯤 되면 하이테크놀로지 복합 예술의 영역이 아닐까?
이 책은 지난한 술 빚기를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게 탄생한 보물 같은 술들에 관한 책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저자는 자신의 오랜 애정과 관심이 묻어나는 한주 이야기 속에서 효율과 이윤의 논리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의미와 가치들을 길어내어 우리에게 '제대로 먹고 마시는 것’에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술에 대한 지식은 물론 한주의 바탕이 되는 농업, 주세법, 외식업, 마케팅, 도예, 투어리즘, 귀농귀촌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치 생활 밀착형 문화비평서를 읽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이 단순히 양조장과 술을 소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술이 빚어지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온 것이 특히 좋았다. 양조장 방문에 적절한 시간과 주변 볼거리까지 고려하여 지역을 찾아가는 방법을 설명한 것부터 홍천에 양조장이 많은 이유, 부산 전포동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까지 로컬 한주 씬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야기들 덕분에 가이드북이자 기행문으로써도 유익하고 흥미진진하다.
잘 만든 한주를 입에 머금으면 술 한 잔에 담겨있는 오묘한 생태계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술잔 안에서 맛과 향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미생물들의 생태계, 술의 재료가 되는 곡물이나 과실이 땅에서 나고 자라는 생태계,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우리 몸의 생태계다. 이것을 한번 제대로 체험하고 나면 돌아갈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조만간 이 책의 도움을 얻어 강을 건너온 반가운 사람들과 함께 한 잔 하기를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