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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jActivity Dec 23. 2020

'예측 가능한 미래'라는 '덫'

<미래는 오지 않는다>

  잠시 인류의 미래를 떠올려보자.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상관없다. 당신이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것은 인류가 직면한 위기와 문제들을 극복한 이상적 유토피아의 모습일 수도, 혹은 정반대로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음울한 분위기의 미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당신이 그린 미래상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자. 당신이 상상한 미래와 현재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은 무엇인가? 혹시 당신은 하늘을 나는 자동차, 핵융합 발전, 인공장기, 인공지능 로봇, 테라포밍 같은 첨단과학기술의 이미지들을 동원하여 미래를 상상하지는 않았는가? 당신이 그것들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의 상상력이 전혀 도달하지 못한 부분, 즉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여전히 간과되어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그리는 미래의 모습은 저마다 판이하게 다르지만, 우리는 ‘미래’를 자연스레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첨단과학기술과 연관 지어 상상하는 어떤 공통적인 경향성을 갖고 있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 그런 경향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정부의 정책 로드맵, 주식 시장, 대중문화, 초등학생들의 상상화 그리기 대회 등등... 미래에 대한 상상이나 예측과 과학기술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어렵게 느껴진다.

  얼핏 생각하면 미래와 과학기술을 연관 지어 상상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이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고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혹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미래라는 개념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그것에 대해 상상했을 방식들을 막연하게나마 상상해보라.


  현대의 미래 담론, 그 중심에 과학기술이 공고히 자리하고 있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도래해야 할 첨단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바로 이런 미래 담론에 대한 의문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이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를 연구하는 두 저자는 여러 과학기술 사례들을 통해 현대의 미래 담론, 즉 우리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그 자체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저자들은 주류 미래 담론이 가진 현재성과 편향성에 주목하여, 전문가들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미래 담론이 결코 미래에 대한 객관적인 전망이나 예측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황우석 사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한 부도덕한 과학자가 벌인 터무니없는 사기행각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저자들은 ‘황우석 사태’에서 과학기술-미래 담론의 확산 양상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황우석의 줄기 세포 연구는 엄밀한 학술적 검증을 필요로 하는 학술지나 논문의 형식이 아니라 언론을 통해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 연구소, 기업, 언론의 긴밀한 협업이 빛을 발했다. 뒤늦게 연구에 심각한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줄기세포-미래 담론의 중심에 있었던 황우석은 학계에서 퇴출되었지만 줄기세포 연구 개발이 언젠가 대박을 칠 것이라는 기대는 오히려 가속되었다.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비와 투자자금이 어마어마하게 몰렸다.


  먼저 과학기술의 발전이 있고, 그것에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 기대, 약속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담론이 제공하는 기대와 약속이 과학기술의 연구방향, 속도, 연구 규모에 관여한다.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 동떨어져 성실하고 엄밀하게 연구를 진행하는 것만으로 지금의 과학기술은 성립할 수 없다. 충분한 지지와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언론 플레이와 정치적 네트워킹은 필수”인 것이다. 아직도 그 정체가 불분명한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미래’ 담론의 기폭제였던 ‘알파고’, 레이 커즈와일의 ‘기술적 특이점’, ‘일론 머스크’ 같은 지금의 과학기술-미래 담론의 생산기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미래에 대한 담론과 예측은 당대의 세계관과 이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결핍과 욕망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그렇다면 ‘황우석 사태’가 보여주는 그 시절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난치병과 불치병의 극복, 생명공학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대한민국의 형상, 그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이득 등...

  거대 테크기업들이 주도하여 퍼뜨리는 2020년의 과학기술-미래 담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최첨단 과학기술-미래 담론 안에서 과학의 의의는 사적, 집단적 이익의 형태로 쪼그라들어 공공성과 상상력을 잃고 있다. 거대 테크기업들은 자신들의 혁신적인 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처럼 떠들지만, 자신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주는 착취와 예속, 그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입을 닫는다. 그들은 그것들을 변화시킬 생각도 능력도 없다. 이것이 기대와 약속을 내세우는 과학기술-미래 담론의 함정이다.


  아무리 최첨단 과학기술이 등장하는 미래 담론이더라도 기본적으로 전제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인간은 반드시 호흡을 통해 대기 중의 산소를 공급받아야 한다든지, 지구에 내리는 비의 pH는 5.6 이상의 산도를 갖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미래 담론에는 온갖 비현실적이고 상상적인 요소들이 동원되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당대에서 자연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온갖 희토류와 희귀 광석이 풍부한 소행성 채굴에 대한 미래 담론을 들여다보면 자연을 개발을 위한 수단이자 착취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 것이 지극히 보편적이고 당연하다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새로운 소행성이 발견될 때마다 매번 천문학적인 액수를 동원하여 소행성 채굴의 경제적 가치를 매기는 것을 보면 ‘이것이 미래의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인류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라는 픽션에 너무 심취해 있었다는 인류학적 증거가 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처럼 현재의 많은 요소들과 강력하게 결속된 미래 담론은 미래에 대한 상상을 오히려 제한한다. 국가가 소멸한 정치-미래 담론이 드물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극복된 경제-미래 담론을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국적 미래를 그린 블록버스터 영화 속 세계의 모습들을 떠올려 보라.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이 단번에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과학만능주의, 기술만능주의적인 견해를 보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새 발표된 최첨단과학 소개한 기사에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과학이 미래다.”라는 식의 희망적인 댓글이 달려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조만간 요것만 해내면 온갖 골치 아픈 문제들이 해결되고 세상이 나아진다는데 뭐 나쁠 게 있겠나 싶다. 그러나 이런 무성찰적, 무비판적 견해는 과학기술의 우연성과 역동성을 간과한다.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자동차가 마차를 끄는 말들이 배설한 말똥으로 넘쳐나는 더럽고 냄새나는 거리를 해방시켜줄 ‘청정기술’로 받아들였다.

  만능주의적 담론에는 진보와 퇴행이라는 선형적인 이분법 밖에 없다. 새로 등장한 과학기술에 대한 우려를 내비치면 시대에 역행하는 퇴행적 발상이라며 원시시대로 돌아가라는 비아냥을 듣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의문을 품어야 한다. ‘과학기술은 과연 발전하는 것인가? 그것이 인류문명이 진보하는 유일한 길인가?’ 진보와 퇴행이라는 일차원적인 판단기준을 넘어서서, 다층위적이고 다차원적인 관점을 확보해야 한다. ‘발전’과 ‘진보’라는 어휘에 내재되어 있는 시간성과 긍정성을 의심해야 한다. 인류문명과 과학기술, 그것은 진보하고 발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끊임없는 변형과 수정을 거쳐 매 순간 재구성되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온갖 통계자료들을 끌어 모아 어쨌든 인류는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피엔스>나 <팩트풀니스>식의 반론을 들이밀며 이래도 인류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난센스다. 한 사람의 일생을 빼곡하게 기록한 온갖 문서와 도표들을 가져와서 이 사람이 인생을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팩트가 아니라 픽션이다. 삶의 조건이 바뀌었다고 해서 삶이 자연스레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삶에 서사를 구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픽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생각해보면 어떤 미래 담론들은 지독하게 인기가 없다. 누군가에게 불편한 미래 담론, 당대의 통념과 가치에 반하는 미래 담론은 무시당하거나 적극적으로 방해를 받는다. ‘기후변화-미래’가 대표적일 것이다. 지구온난화 얘기는 내가 초등학생, 아니 국민학생 시절부터 듣던 것이지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지구온난화를 사회 문제로 규정한 것이 1970년대라고 하니 50년 가까이 변죽만 울리고 있던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야 ‘기후변화-미래’가 멀지 않았음을 몇몇 사람들이 체감하고 있는 것 같다.

  존 레논의 ‘이매진-미래’도 이제는 인기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국가가 없어지고 대립이 사라진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미래 따위에 도대체 누가 관심을 두고 있을까? 만나보기 힘들 것 같다.

  내가 가진 미래상 중 하나는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교감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유전적 시술이 가능한 미래다. 멸치든 고양이든 달팽이든 붉은사슴뿔버섯이든 어느 한 종의 생명체를 골라서 그것과 교감 가능한 능력을 얻어, 공동체가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 내가 교감하는 생명체의 입장을 전달하는 위임을 받는 것이다. 이것도 경영-매니지먼트가 달려들어 수익성 빵빵한 비즈니스 모델을 뽑아내기 전까지는 더럽게 인기가 없을 것 같다.


  장밋빛 미래를 얘기하는 과학기술-미래 담론은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데려올 것을 약속하며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들을 따를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미래는 그런 식으로 오지 않는다’. 미래는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가 끊임없이 떠나고 도달하기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들의 경계를 교란하는 온갖 미래상들이 부대끼며 끊임없이 현재를 공동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의 부단한 반복이 미래의 본질이다.

  하나의 관점에서 예측 가능하고 설명 가능한 미래라는 것은 허상이다. 미래 담론은 객관적인 예측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과 논쟁이 필요한 정치의 대상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믿고 따를 하나의 담론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는 온갖 상상들의 난상공론이 필요하다. 다양한 관점에서 현재의 문제들과 갈등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실현해나가야 할지 격렬하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선택과 결정 직전까지 판단을 유보한 채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를 보다 나은 것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미래에 대해 더 나은 방식으로 상상하고 논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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