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청소년기에 뉴밀레니엄을 맞았다. ‘앞으로 세상은 아무리 똑똑해도 컴퓨터 못 다루면 쓸모없는 인재’라는 구호 아래 IT꿈나무들을 양성한답시고 별의별 IT인재 개발정책들이 마치 아이들을 종용하듯 전방위적으로 시행되던 시기였다. 나 역시 이런 시대의 은혜를 입어, 대다수 또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루 죙일 컴퓨터 게임만 하며 자랐다.
어린 날, 정말 많은 것들을 게임으로 해결했다. 새 학기에 친구를 새로 사귀는 것도 게임,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게임, 여럿이 모여 놀아도 게임, 시험을 잘 봐도 게임, 시험을 망쳐도 게임이었다. 내가 시대의 흐름에 잘 적응했던 것인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어찌 대학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했다. 고등학생 때는 0교시와 야자에 시달리느라 그렇게나 게임할 시간이 없었는데, 대학에 오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래서 눈이 벌겋게 될 때까지 죽어라 게임만 했다. 지루하고 번거롭기 짝이 없는 데다 미련하게 느려 터진 모니터 바깥세상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온갖 첨단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우리 문명을 보다 더 근사하게 만들고 있으며 그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이야기를 질리도록 들으며 자랐다. 그것은 하나의 주장이나 해석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필연적 사실로서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였을까? 대학시절, 나는 기술의 발전이 도래시킬 유토피아적 미래의 이미지에 흠뻑 경도되어 있었다. 아주 드물게 시험공부에 필요한 참고 서적을 빌리러 학교 도서관에 가면 서가를 빼곡하게 채운 어마어마한 수의 장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보다 발전된 최첨단 문명을 향해 힘차게 전진 중인 21세기에, 누렇게 바래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책 따위는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박물관에나 어울리는 물건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주변의 적잖은 이과생, 공대생들이 이런 편향적인 ‘반지성주의’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백날 게임만 하느라 현실을 도외시한 채 자란 인간이 삶을 순탄히 살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삶의 골목골목, 불현듯 마주하게 되는 크고 작은 것들은 매번 나를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삶과 세상을 아프게 감당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일례로, 엉망인 성적으로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고 재수 좋게 IT회사에 취직한 뒤, 나는 극심한 인지부조화를 겪었다. 영리 기업이라는 틀 안에서 몸소 겪어본 결과, 기술의 발전이 딱히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오히려 문제만 잔뜩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감에 빠졌다. 기업은 이윤을 통해 영속성을 추구하며 어쩌구 하는 말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오만 가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도처에서 기회주의자와 속물들의 염치없고 비루한 말들이 범람했다. 환멸스러웠다.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런 혼란을 겪는 와중에도 나는 어엿한 사회인이고 국민이자 회사의 직원으로서 내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해야 했다.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종일 '이 세상은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혀 지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것의 원인이나 의미에 대한 실마리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도무지 떠나가지 않는 이 ‘이상한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겠다고 생각했을 때, 까닭 없이 제일 먼저 책을 떠올렸다.
제대로 된 독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내게,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만으로 괜찮은 책을 찾아내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무작정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다 정신적 미아 상태에 빠져 당황하곤 했다. 정신을 부여잡고 돌고 돌아 결국 만만한 베스트셀러 코너 앞에 서서 유명인 누군가가 감명 깊게 읽었다던, 혹은 최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소개되었던 책들을 집어 들었다. 팔랑팔랑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보아도 별 감흥이 없었다. 나는 뭔가 별론데 이게 왜 화제의 도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 것과는 다르면서도 또 어딘가 맞닿아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책을 찾아내고, 어떤 책을 슬쩍 펼쳐 보았을 때 이 책과 내가 합을 맞춰보면 어떤 시공간이 펼쳐질지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는 감각을 갖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는 과거의 나처럼 책을 읽어보고는 싶은데 도서관이고 서점이고 일단 책이 너무 많아 그 수에 압도당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과, 특히 좋은 책이라고 해서 기껏 구해 읽었는데 왜인지 너무 별로라고 느껴져서 언짢았던 경험이 누적되어 안타깝게도 책과 거리가 멀어진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씩씩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언어들로 재밌고 건강한 독서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책을 고르기 전, 책값과 읽는데 들이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블로그나, 인터넷 서점의 리뷰를 찾아본다. 하지만 이상하게 베스트셀러의 경우는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이 ‘빠’와 ‘까’로 나뉜 별 도움도 안 되는 한 줄 평만 우르르 나오는 게 현실이다. ‘내용이 너무 와 닿아 위로가 되었다. 요새 내 마음이 딱 이랬다.’라던가 ‘얄팍한 베스트셀러에 혹하지 말고 제대로 된 고전을 좀 읽으세요.’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그나마 한 줄 평보다는 긴 언론 기사의 베스트셀러 소개는 출판사가 뿌린 호평일색의 ‘보도자료’를 적당히 고쳐 쓴, 다분히 의도가 수상쩍은 것들 뿐이다. 저자는 ‘왜 그렇게 많이 팔리고 읽힌 베스트셀러에 대한 제대로 된 서평은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미움받을 용기>로 대표되는 자기 계발서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1 Q84> 같은 문학작품은 물론 작년에 출간되어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반일 종족주의>까지 최근 5년간의 베스트셀러 28권을 몸소 읽고 서평을 썼다. 저자의 서평은 단순히 28권의 베스트셀러에 대한 구체적이고 제대로 된 평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정권을 넓혀 각각의 베스트셀러들이 왜 많이 팔리고 널리 읽히는지, 즉 ‘베스트셀러 현상’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통찰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베스트셀러들에 대한 섬세하고 올바른 비평을 전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다양하고 재미있는 책들을 찾아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책을 읽고 서평을 썼다는 작가의 말에, 마냥 웃기게만 보였던 책의 제목이 사뭇 달라 보인다. 마치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엄숙한 말을 남긴 채, 혈혈단신 적진으로 향하는 용맹한 장수의 비장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다루고 있는 28권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까는’ 서평들이다. 하지만 비평 속에서 드러나는 섬세함과 성실함 그러니까 ‘각 잡고 제대로 까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강점이다. 저자의 비평은 ‘이 책은 이런 점은 좋은데 저런 점이 아쉽네요. 하지만 뭐 이런 책도 있을 수 있죠.’ 정도로 얄팍하고 무책임하게 끝나지 않는다. 독자의 입장에서 책이 왜 불편하고 구리게 느껴지는지 면밀히 따져 들고, 이 책이 왜 나쁜지 조목조목 인용해가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책이 너무 웃기고 재밌다. 책 읽다가 빵 터져서 소리 내어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통쾌할 정도로 날카로운 비평과, 웃긴 부분이 너무 많아 마구 인용해서 여러분을 웃기고 싶지만 이 책을 읽을 분들의 재미를 위해 참기로 했다.
저자는 다양한 맥주를 마셔봐야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맥주를 가려내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안목이 생기는 것처럼, 책도 마찬가지라고 비유한다. 자신의 취향 위주로 마음껏 책을 읽되 흥미와 관심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 그래서 어떤 책이 자신과 잘 맞는지 알아가는 선구안을 갖는 것. 즉 풍부한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내공을 쌓는 것 외에는 독서력을 기를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맨날 편의점 맥주만 꼴깍거리다가 친구에게 끌려간 와바(WABAR)에서 신세계를 맛보았던 음주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비유다.
2019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성인 독서량은 2017년 8.3권에서 2.2권이 줄어든 연간 6.1권이다. 초등학생 69.8권, 중학생 20.1권, 고등학생 8.8권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인의 삶이란 초중고를 거쳐 성인이 되어가는 동안 책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모양이다. 어른의 독서는 아무래도 좀 더 고상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책 읽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여튼 한국 성인이 1년에 간신히 6.1권을 읽는다는 건데, 그중 한두 권 정도는 읽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치고, 밤잠을 미루게 되는 즐거운 경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를 소개하게 되었다. 맥주로 따지면 정말 흥미로운 조합의 샘플러가 아닐 수 없는 이 책이 여러분들에게 만족스러운 독서, 즐거운 독서에 대한 훌륭한 가이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