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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jActivity Jan 09. 2021

책의 '질'을 논하는 서평을 쓰고 읽는다는 것의 의미

<서울리뷰오브북스> 0호

  중학생이던 시절 어느 늦은 밤이었다. 부모님이 한창 바쁘던 시기라,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집에는 나와 동생 둘 뿐이었다. 나는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서 무료하게 TV 채널을 계속 넘기며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오는 요란한 음악소리에 ‘이게 뭐지?’하고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M.net의 ‘타임 투 락’이었다. 정확하게 무슨 곡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날 것의 느낌으로 꽉 찬 밴드의 연주와 삐딱한 표정의 보컬이 거침없이 뱉어대는 공격적인 가사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일종의 정신적 충격을 받아 띵해진 나는 브라운관 TV에서 흘러나오는 화면과 소리를 무방비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음악과 ‘조우’하고 말았다'라는 다소 오글거리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천리안의 음악 관련 포럼과 사설 BBS에 상주하며, 충장로의 ’뮤직메카‘, ’광주소리사‘를 수시로 드나드는 ’락, 메탈 키드‘가 되었다.


  ‘타임 투 락’, PC통신, 인터넷, 음반점 사장님이나 친구들의 추천을 통해 정말 다양한 음악을 접하고 들었다. 그렇게 별의별 음악들을 찾아 듣다가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음악(예술)의 영역에서는 음반 판매량이나 차트 순위 같은 ‘양’적인 것들이 그 음악(예술)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 예술이란 어떤 면에서 결코 ‘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는 ‘질’을 추구하는 다양성의 영역이라는 것.

  더 이상 음악 방송의 인기순위나, 빌보드 차트는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음악의 ‘질’에 대한 제대로 된 얘기가 절실했다. 게시판에서 허구한 날 벌어지는, 레드 제플린 팬과, 핑크 플로이드 팬과 도어스 팬과 주다스 프리스트 팬과 메탈리카 팬과 너바나 팬과 라디오헤드 팬과 림프 비즈킷 팬들 간의 끊임없는 ‘누가 제일 짱이냐?’ 수준의 논쟁과 ‘올해 가요대상은 누가 탈 것인가?’를 예측하는 이야기들이 지긋지긋했다.


  <핫뮤직>(HOT MUSIC)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 기억으로 <핫뮤직>은 국내에 유일무이했던 대중음악 전문지였다. <핫뮤직>에는 ‘질’의 관점에서 음악을 다룬 좋은 글들이 정말 많았다. 아직 음악도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아티스트와 앨범에 대한 비평을 읽는다는 게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그것은 매번 설레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여전히 아끼고 즐겨 듣는 메탈 음악들은 대부분 <핫뮤직> 덕에 알게 된 것들이다. 2008년 5월호를 마지막으로 <핫뮤직>은 폐간되었다. 시대의 흐름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서점에도 인터넷에도 아직까지 <핫뮤직> 정도의 대중음악 전문지를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소설가 장강명의 에세이 <책, 이게 뭐라고>에서 영화와 대중음악 비평의 부재, ‘비평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장강명과 함께 독서 팟캐스트를 진행했던 가수 요조는 자신의 책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에서 “나는 나에게도 해설이 있었으면 한다. 누가 내 해설을 써주었으면 한다.”라고 썼다. 장강명은 이를 ‘해왕성’만큼 황량한 대중음악 비평에 대한 요조의 막막함으로 읽는다. 안타깝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빌보드와 멜론차트는 여전히 건재하다.


  ‘질’을 추구하는 영역은 필연적으로 비평을 수반하고 그것을 필요로 한다. 창작물이 비평과 평론 같은 2차 창작물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든다. 비평과 평론도 결국 어떤 창작물을 재료로 한 창작물이다. 이처럼 ‘질’의 영역에서는 일회적인 ‘양’의 판단이 아닌, 창작물들의 연쇄반응이 더 중요하다. 이 부단한 연쇄반응을 통해 인간이 세계에 더 다양한 의미들을 생성하고 부여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문화가 아닐까? ‘문화는 인류가 위기에 직면하는 기술’이라는 명쾌한 정의를 다시금 떠올리며 문화와 다양성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철저하게 숫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양’의 영역에서 비평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는 기업의 정책과 윤리의 ‘질’에 대해 비평할 수는 있어도 계속해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는 기업의 주가를 비평할 수는 없다. 예술과 경쟁의 논리가 혼재하는 스포츠는 좀 어중간하다. 손흥민이 아무리 ‘예술적인’ 골을 넣어도, 김연아가 아무리 감동적인 연기로 보는 이들을 가슴 저리게 만들어도, 그것들은 결국 숫자 즉, ‘양’으로 환원된다. 예술적인 한 골보단 얻어걸린 두 골, 김연아의 219.11점보다는 소트니코바의 224.59점이 우월한 것으로 판단된다. ‘졌잘싸’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대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도 결국 ‘쪽수’, 숫자에 휘둘리는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의 ‘질’을 논하기 전에 엉뚱한 사람들이 다수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의석수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양’은 명확하다. 대신 위험하다. 자본이 그렇고, 점수가 그렇고, 쪽수가 그렇다. ‘질’을 추구해야 할 영역에 ‘양’의 논리를 들이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이상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판단하고 비평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능한 최소한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 높은 성적을 받거나 자격증을 취득하는 ‘양’적 효율 논리가 교육 전반에 자리 잡으면 그것으로 교육은 끝장이다. 공부를 가급적 적게 하고 높은 성적을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교육에, 누가 무엇을 가르치고 누가 무엇을 배울 것인지를 고민하고 논의하기 위한, 교육의 ‘질’의 언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낚시가 유일한 취미인 나의 아버지는 물고기를 평소보다 많이 잡았다고 더 좋아하거나 허탕을 쳤다고 해서 실망한 적이 없다. 심지어 자신의 맘에 쏙 드는 자리를 발견하면, 그곳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자리가 아닌 걸 알면서도 낚싯대를 펼치는 사람이다. 그저 그날의 날씨, 낚싯대를 드리운 강가나 호수의 풍경 그리고 홀로 앉아 묵묵히 자신의 마음을 이리저리 찬찬히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더 즐기시는 것 같다. 아버지에게 낚시는 ‘양’의 영역이 아니라 철저히 ‘질’의 영역에 속한다.

  내가 시큰둥하게 여기는 것들도 대체로 ‘양’의 논리가 지배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들인 것 같다. 나는 사람들의 나이에 관심이 없다. 가까운 이들은 물론 나 자신의 나이조차 바로 떠올리지 못한다. 그렇게 열심히 했었는데 점수 경쟁과 캐릭터의 성장만을 추구하는 보드게임이나 PC게임도 언젠가부터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지금은 '항아리 게임'으로 알려진 ‘Getting Over It’의 엉뚱한 심오함이나 ‘Never Alone‘같은 게임이 풀어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에 더 관심이 많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동안 내 업이었던 빅데이터도 ‘질’을 기어코 모조리 ‘양’으로 환원하려는 강박적인 꼴이 너무 지긋지긋해져서 그만두었다. 주식이나 가상화폐에 투자하여 돈으로 돈을 불리는 것에도 도통 관심이 없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지독하게 답답한 인생이다. 그러나 나는 ‘양’의 논리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획일화된 가치와 기준에 나 자신을 집어넣는 것 자체가 못 견딜 정도로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잡설이 길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를 읽다가 잊고 지냈던 <핫뮤직>을 떠올렸을 뿐인데 말이 길어졌다. 쓰려던 독후감으로 돌아간다.



  뒤늦게 독서에 흥미를 붙여 최근 몇 년간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뒤, 나를 가장 당혹스럽고 의아하게 만들었던 것은, 책은 정말 많은데 정작 ‘책에 대한 이야기’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너무나도 빈곤하다는 사실이었다. 한 때 가장 인기 있었던 주말 예능 ‘느낌표’의 간판 코너가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였던 시절도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벌써 20년 전이다.

  아무리 책을 읽는 것이 기댈 데 없는 고립무원의 행위라고는 해도, 책과 독서가 그저 자기 계발과 개인적 취향의 영역으로 쪼그라든 채 소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는 남들 모두가 읽었다고 여겨지는 ‘필수 도서’들을 맹목적으로 따라 읽거나,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 짓기 위해 ‘나만 알고 싶은’ 책을 읽는 분극화된 독서 양상만이 남은 것일까? 더 이상 책을 통해 누군가와 교류하고 독서의 즐거움을 나누는 일은 요원한 일이 되어버린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절실하게 무엇인가를 읽거나 쓰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범람하듯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의 수적 공세와, 판매부수와 별점으로 책의 운명이 결정되는 ‘양’의 논리에 파묻혀, 절실하게 읽고 쓰는 사람들과 책들의 연쇄반응은 어딘가에 고립되고 정체된 채, 질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을 읽고 쓰는’것도 결코 ‘양’의 논리만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에 포함될 것이다. 일전에 독후감을 남긴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는 베스트셀러 현상으로 대표되는 독서의 ‘양’화를 ‘제대로 된 서평’이라는 지극히 ‘질’을 다루는 방법으로 되받아친 용감하고 훌륭한 시도였다.

  책을 다루는 이야기의 빈곤함과 부재라는 문제는 <서울리뷰오브북스>의 편집위원들이 서평 전문지를 창간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책에 대한 더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서평지라는 매체로 말미암아 저자와 독자, 그리고 책의 ‘질’적 매개를 촉발하고, 독서를 보다 깊이 있고 즐거운 성찰적인 행위로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고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편집장의 말을 들어보자.


  “좋은 서평의 부재라는 문제 속에서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창간의 돛을 올립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중요한 주장과 해석을 담았지만 널리 주목받지 못한 책을 발굴해서 제대로 평가할 것입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과장과 허풍이 심한 책에 대해서 비판의 칼을 들이댈 것입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좋은 책이 담고 있는 의미 있는 주장과 해석을 쉬운 언어로 소개할 것입니다. “이제 책은 죽었다”, “책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탄식이 곳곳에서 들리지만,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이를 넘어 좋은 책이 세상에 변화와 차이를 만들어 내는 역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 7쪽


  <서울리뷰오브북스> 0호를 펼쳐본다. 편집위원들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다양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철학, 역사, 문학, 한국어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자연과학, 과학기술사, 건축학, 미디어. 문학에만 국한된 문예비평 전문지나, 연구자와 전문가들의 영역인 학술 비평의 한계를 넘어선 서평 전문지가 드디어 나왔다는 느낌이다.

  하나씩 하나씩 서평을 읽어나간다. 각자 전문 분야가 다르고, 읽은 책이 다른 만큼 서평을 통해 엿보이는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애정 어린 관심도 편집위원들 저마다 다르다. 이런 다양한 관점과 차이들을 발견하는 것이 <서울리뷰오브북스>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 같다.


  강예린의 <정크스페이스 | 미래 도시>와 <짓기와 거주하기>에 대한 서평, ‘밀실에서 나오는 지도를 그릴 수 있는가?’를 읽다가 문득 독서란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세상에 대한 어떤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르게 질문을 만들고 제대로 묻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서평은 ‘교외형 프리미엄 아웃렛’이라는 거대한 공간에 집중하여 팬데믹과 공간의 문제를 고찰한다. 서평을 읽으며 나는 몇 달 전 대형 쇼핑몰 스타필드 고양점에 처음으로 가보았다가 쇼핑몰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당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큰 쇼핑몰이 생겨났는지, 어째서 사람들이 이렇게나 몰링에 열을 올리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다. 바로 '우리는 이 밀실과도 같은 공간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였다.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서로의 안전을 약속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체화하고 있기도 하다. 마스크 뒤에 숨어서 사회 교류 대신 쇼핑으로만 공공생활을 이어 간다면, 팬데믹이 지나간 자리에 정크 스페이스가 도시를 완전히 대체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 쇼핑-도시로 들어갈 수 없는 집단은 사회적으로 격리될 것이다.

  결국 쇼핑이라는 밀실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오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 이 밀실로부터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추리해야 할 시기이다." - 51~52쪽


  별책에 수록된 ‘김영민의 먹물누아르 : 이것은 필멸자의 죽음일 뿐이다’도 배꼽을 잡고 웃어가며 재밌게 읽었다.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를 이미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보다 웃기고 씁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공부란 무엇인가>의 흑화버전 이라고나 할까?     


  충실한 내용의 서평과 글도 훌륭하지만 외적으로도 독자들을 배려하고 신경 쓴 부분들이 눈에 띈다. 서평의 말미마다 글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같이 읽어 봄직한 책을 작게 소개해둔 ‘함께 읽기’가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열세 명의 편집위원들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제목들을 늘어놓은 ‘지금 읽고 있습니다.’가 좋았다. 다음 호에 서평이 실릴지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에서 책들을 하나 씩 검색해보며 ‘편집위원들은 이런 책을 읽고 있구나.’하고 흥미로운 책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서울리뷰오브북스>의 홍성욱 편집장은 “독서란 고독하고 서늘할 정도의 개인적인 침잠”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독서란 본디 기댈 곳 없는 고립무원의 행위다. 그러나 우리는 시리도록 고독한 독서를 통해 비로소 다른 누군가와 진정으로 조우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하겠다.


“캄캄한 밤길을 끝없이 걸을 때, 힘이 되어 주는 것은 튼튼한 다리도 억센 날개도 아니고 친구의 발걸음 소리다.”


  사람은 저마다의 삶의 궤적을 따라 수많은 경험을 하고 거기서 피어나는 생각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마주하는 고민들도 제각각일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그 모퉁이에 서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게 되는 밤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너무 캄캄해서 방향은커녕 앞뒤조차 분간도 되지 않는다. 그럴 때는 나의 다리가 튼튼하고 날개가 강인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세상에 나만 홀로 남은 듯한 절망감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이내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곳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캄캄해서 얼굴도 보이지 않고 말수도 없지만 묵묵히 내 옆을 걷고 있는 그 발소리의 주인이 꼭 친구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둠 속으로 기꺼이 발을 내디딜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함께 걸으며 나아간다. 결코 두렵지 않다.


  우연히 펼친 책에서 발견한 단 한 줄의 문장과 그것으로부터 떠올린 것들이 흡사 '캄캄한 밤길에서 만난 반가운 발소리'와 같은 것으로 느껴지는 기적 같은 순간들이 우리 삶에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삶과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하나의 방법인 ‘읽고 쓰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전달하고 일깨우는 매개체로서 <서울리뷰오브북스>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우리들의 삶을 더 많은 숫자들로 채워나가기를 바라는 것을 넘어서서, 삶에서 보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길어내어 우리들의 삶과 세계를 다채롭고 풍부한 것으로, 더 나은 모습으로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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