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불타는 늪/정신병원에 갇힘>
<바깥은 불타는 늪/정신병원에 갇힘>을 읽는 내내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잠시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이상(李箱)이었다. 아아, 이 치사한 세상에서 끝끝내 완전히 증발하여 무덤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 황량한 이름을 나는 이렇게 또다시 떠올렸다.
그야말로 ‘정신병자의 요설’이 아닐까 싶은 이상의 글에 홀린 듯 마음을 빼앗긴 이후, 나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몇 해를 주기로 이따금 그의 글을 꺼내 읽는 버릇이 생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더니즘’이 어쩌구 ‘포스트모던’이 어쩌구 하며 요란스럽게 떠드는 선형적인 담론들을 경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최고 ‘모던뽀이’이자 폐병환자였던 이상은 종로와 인사동에 카페인지 다방인지를 몇 번 차렸다가 집안 재산을 몽땅 말아먹고, 지긋지긋한 짝퉁도시 경성을 떠나 진짜 근대를 찾아 동경으로 최후의 도주극을 벌인다. 최첨단, 최신식 문물로 가득한 동경이 자신과 자신의 문학을 구원하리라 굳게 믿고서. 그러나 순진했던 청년 이상은 ‘몹시 가솔린내가 나는’ 동경에서 근대의 실체를 발견하고 좌절한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는 그곳에서 죽는다.
이상의 명석함은 소름 끼칠 정도로 섬뜩한 직감과 예리한 직관에 있다. 이상은 동경에서 ‘환멸을 당해’ 반송장 몰골의 방구석 폐인이 되어버렸지만 결코 자신의 재능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피폐해진 자신을 산 제물 삼아 자신의 가장 탁월한 작품들을 써냈다.
그가 동경에서 발견한 것은 최첨단의 이상적인 근대가 아니라, 그저 경성보다 조금 더 정교하게 ‘혼모노행세’를 하는 버전의 짝퉁근대였다. 그럼 어디에 가야 ‘진짜 근대’가 있을까? 런던? 파리? 뉴욕? 이상은 그 어디에도 ‘진짜 근대’따위는 없음을 직감한다. 정교함의 정도만 다를 뿐 20세기의 도시라는 것은 근대라는 ‘관념’을 뒤쫓느라 허우적대는 짝퉁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든 마루노우찌빌딩 ―마루비루―는 적어도 이 마루비루 의 네 갑절은 되는 굉장한 것이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가서도 나는 똑같은 환멸을 당할른지." - <동경>
이상이 막연히 환멸을 예감했던 브로드웨이를 품은 바로 그 뉴욕에서 우리의 망상증, 분열증 환자 김사과는 <바깥은 불타는 늪/정신병원에 갇힘>을 써내는 것으로 이상이 20세기를 두고 했던 것과 비슷한 양태의 어떤 작업을 21세기를 상대로 시도하려는듯하다.
이상은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마주한 것을 탐구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김사과는 이상이 죽었던 나이를 훌쩍 넘어 아직 살아남아있다. 이상이 근대성의 정체를 목도하고 무너져버렸다면 김사과는 기꺼이 그 내부에 자신을 위치시켰다. 그리고 이 ‘불타는 늪’에서 투덜거리고, 빈정거리고, 낙담하고, 환영을 보고, 비관하고, 괴로워하고, 자조한다. 착란과도 같은 뉴욕의 괴이한 풍경과 함께 음습한 벽지에 눌어붙은 망상들이 문장 위를 흐느적흐느적 떠다닌다.
"나는 미국인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정반대다. 미국인들의 고지식함에 번번히 감동한다. 그들은 택배를 세 번이나 잘못 보낸 아마존에 전화를 걸어 항의할 때도 절대 화내지 않는다. 말도 안 되게 지치게 만드는 미국의 복잡한 병원 의료시스템에 대해서도 절대로 화를 폭발시키지 않는다. 그저 참고 또 견딜 뿐. 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접한 미국인들은 항상 약간은 호소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온갖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하는 눈물겹게 전투적인 자세.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제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도착하지 않는 택배, 사라져버린 음식, 자꾸만 파손되어 나타나는 물건들 앞에서 나에게 허용된 것은 맹목적 믿음 속 진지한 호소뿐. 전화기 속 녹음된 목소리 너머, 채팅 창에 뜨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문장 너머 과연 진짜 인간이 존재하는 걸까? 쓸데없는 질문이다. 그저 믿음으로 호소해야 한다. 착한 개와 같은 맹목적 긍정주의와 함께 전진해나가는, 언제나 넘실거리는 파산의 가능성에 두근대며, 이 엉망진창의, 끊임없이 사들여도 도무지 쌓이지가 않는 이상한 모래성의 소비 세계를 죽을 때까지 헤쳐나가는 것은 미국인들의, 아니 과연 미국인들만의 운명인 걸까?" -p.109
21세기, 여전히 이 징글징글한 세계, 어떻게든 미치지 않으려 간신히 버티고 있는, 아니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고 끊임없이 되뇌는 사람들의 강박적으로 표백된 이야기들이 싸구려 구원처럼 넘쳐나는 시대, 그것들은 아무리 좋게 봐도 결국 ‘병상일기’다. 왜냐하면 이곳은, 이 세계는 아름답고 달콤한 이상과 고통스럽고 황폐화된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아분열에 시달리며 갇혀있는 우리들의 ‘정신병원’이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 스스로를 ‘정신병자의 요설’, ‘하찮은 광인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책을 읽어볼 이유는 충분하다.
우리는 ‘내가 미친 건지, 세상이 미친 건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순간들을 종종 겪는다. 그러나 위대한 21세기를 유지하느라 야단스럽게도 바쁜 우리는 고개를 흔들고, 뺨을 두들겨가며 제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혹 다음에도 불쑥 그런 망상에 빠져든다면 애써 깨어나려 하지는 마시라. 그것은 기회다. 망상과 분열에 사로잡힌 당신은 비로소 이 책을 펼칠 자격을 얻은 것이다.
읽는 내내 동경의 이상을 떠올렸는데,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는 불현듯 푸코가 떠올랐다. 1971년 11월,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공과대학에서 두 탁월한 사상가의 대담이 있었다. 이날 두 사람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치열하게 주고받은 대화는 녹화되어 네덜란드 국영방송채널에서 방송되었다.
한쪽에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시위에 참여하며 언어학자에서 반체제 지식인으로의 전회를 이뤄내고 있던 노암 촘스키가 앉아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68혁명과 벵센 실험대학에서의 열기를 간직한 채,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로 콜레주드프랑스 부임 첫 해를 성공적으로 마친 미셸 푸코가 앉아있었다.
대담의 막바지에 진행자 폰스 엘데르스는 푸코에게 묘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를 병리학적으로 묘사한다면, 어떤 종류의 광기가 가장 눈에 띕니까?" 푸코는 "현대 사회가 어떤 질병으로 가장 크게 고통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입니까?"라고 되물은 뒤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왜인지 이 질의응답 부분은 편집되어 방송되지 않았다.
"... 하지만 꼭 대답을 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주 기이하고 역설적인 질병으로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질병의 이름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이 정신병은 아주 기이한 증상을 띠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정신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상이 제 대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