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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jActivity Aug 25. 2021

기후위기는 곧 문화의 실패다

<대혼란의 시대>

  2020년의 시작은 당분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대유행이라는 사건과 함께 기억될 것 같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단백질 결정체의 형태로 30억 년 이상을 생존해온 선조 생명, 바이러스는 인간의 신체를 숙주로 삼아 가공할 속도로 복제와 변이를 반복하며 벌써 2년 가까이 인류문명의 흐름을 교란하고 사회적 삶의 형태를 재구성하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팬데믹이 야기하는 두려움은 비가시적인 바이러스의 저돌적인 생명력, 확산, 사회적 파괴력, 즉 ‘보이지 않는 것의 보이지 않는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당혹스러움에서 기인한다. 몇 초 단위로 업데이트되는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 시신을 기다리는 구덩이가 빽빽이 늘어선 묘지, 끝을 알 수 없는 봉쇄기간, 항공사의 파산, 스모그가 걷힌 뉴델리와 맑아진 베네치아 운하의 물을 통해 우리는 바이러스의 위력을 실감한다.


  인류문명을 향해 정면으로 들이닥친 팬데믹의 충격, ‘보이지 않는 것의 보이지 않는 힘’에 슬쩍 가려져버렸지만 2020년의 시작에는 ‘보이는 것의 선명히 보이는 힘’의 충격 역시 존재했다. 바로 2019년 연말부터 정점에 달해있던 ‘호주 산불’로 대표되는 ‘기후재앙’이다. 2020년 1월부터 지금까지 고작 한 해반만 돌이켜보아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재난이 발생했다.

2020년 캘리포니아 산불. AP통신


  팬데믹이 사회제도의 무력화와 개개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공포를 유발한다면, 기후재앙의 압도적인 파괴력은 종을 뛰어넘는 절멸을 예감케 한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전례 없는 폭염과 산불, 홍수와 가뭄, 집단 폐사와 기후난민의 소식이 실시간으로 업로드되고 있다. 경악스러운 재난의 비현실적인 풍경들이 “팬데믹은 생태학적 변이과정의 리허설일 뿐 본편은 기후변화.”라는 말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지금껏 어딘가 찜찜하고 오만하게 느껴졌던 '근현대(Modern)'라는 말은 재난의 물리적 힘 앞에서 위상을 잃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일컫는데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우리는 '인류세(Anthropocene)'를 살고 있다.

  보고 있던 다큐멘터리에서 해양지구과학자가 하와이의 화산지대에서 플라스틱 쓰레기가 용암과 엉겨 붙어 생성된 ‘플라스틱 암석’을 손에 들고 카메라를 향해 말한다. “이건 이곳에 보이는 플라스틱 쓰레기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간 거예요. 지질학의 역사적 일부가 되어버린 거니까요.” 과학자가 탐사하던 해변에는 20년도 더 전에 한국의 식품회사가 생산한 빙초산을 담았던 20리터짜리 플라스틱 말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렇듯 인류문명의 역사는 인류 자신의 기록뿐만 아니라, 지층에도 대기에도 해수에도 가장 적나라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꼼꼼하게 새겨져 있다. 이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은 오래도록 인류세의 증거로 남아있을 것이다.


  줄곧 인류세의 한복판을 살아오고 있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은 코로나 블루와는 다른 차원의 깊은 우울감과 무기력을 수반한다. 그토록 칭송받았던 인류문명의 진보와 발전이 한편으로는 생태학적 자멸의 역사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곤혹스러움.

  지금 이곳의 나 자신과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재난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내 삶의 자취가 직간접적으로 이 위기에 기여했음을 깨달아가는 시간, 우리가 문명의 성취랍시고 추구해왔던 즐거움, 행복, 욕망의 이면에서 외면받고 망각되었던 것들의 영향력을 실감하는 시간, 행성의 얇은 겉껍데기 위의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나와 다른 것들 간의 분리불가능성을 자각하는 시간, 나 역시 조만간 끔찍한 재난에 휩쓸리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시간, 아직 닥치지 않은 파국에 대한 트라우마를 앞서 겪는 시간이다.


  애써 찾지 않아도 매일 재난 소식을 듣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수개월째 꺼지지 않는 산불, 범람한 하천과 산사태에 쓸려간 마을, 녹아내리는 만년설과 빙하의 위태로운 모습이 묵묵히 우리의 과오와 실패를 사정없이 까발린다.

  기후변화의 위험성과 시급성을 알리는 연구 결과와 담론들은 수십 년간 발표되어왔지만 인류는 사실상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전히 누군가에게 기후변화는 의심스러운 것, 예외적인 것,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것,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어쩌면 이토록 무능하고 무감각할 수 있었을까?


  <대혼란의 시대>는 기후변화의 실상에 대한 인식과 사유를 가로막는 원인을 문화에서 찾는다. 탄소경제에 내재된 위험성은커녕 그것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들고, 그것을 포기할 수도 없게 만드는 욕망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문화야 말로 우리가 처한 곤경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저자 아마타브 고시는 말한다. 만약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을 겪은 미래 세대가 지금 우리 시대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착란, 외면, 은폐, 몰각의 흔적들을 본다면 이 시대를 ‘대혼란의 시대’라고 명명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기후재앙이 초래할 대혼란은 지금 이 시대의 관념과 문화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 아니냐고.

  문학, 역사, 정치를 다루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각의 주제를 결코 독립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 간의 우발적인 얽힘과 상호작용에 주목하며 그 근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복잡한 그물망을 펼치듯 다면적으로 뻗어나가는 저자의 탁월한 통찰은, 기후변화를 단순하게 몇 가지 원인들의 결과로 환원하거나, 멀지 않은 미래에 마법 같은 해결책을 찾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피상적인 접근과 발상들을 일축한다.


  비인간의 위상이 사라지고 오직 개인의 내면으로 쪼그라든 근대 예술, 공상과학 소설의 비주류화, 자연재해에 대한 고려 없이 취약한 바닷가에 건설된 대도시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화가 억제됨으로써 탄소 배출 증가량의 폭발적 증가가 지연된 사실, 석탄과 석유의 물질성의 차이에 따른 정치적 효과의 변화, 급격하고 광범위한 산업화로 기후변화를 촉진시키는 가해자이면서 재난에 내몰릴 위기에 처한 막대한 인구수를 가진 아시아 대륙의 중요성, 물리적인 삶의 제약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근대성의 망상, 인터넷과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정체성 이슈와는 달리 기후변화가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 개인적 표현행위로 축소된 정치와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권력의 분리가 초래하는 공적 영역의 교착, 막대한 예산과 자원을 투입한 기후변화 연구와 극단적인 기후변화 회의론이 공존하는 영어 사용국들의 곤경.


  저자는 이런 복잡다단한 결합, 중첩, 간섭들을 가로지르며 기후변화를 인간 행위의 결과물만으로 단순화하여 인식할 수 없는 것임을 보인다. 기후변화는 근대성의 역사에서 망각되고 간과되었던 맥락들과 비인간 행위 요소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연결망에 인간 행위가 과도하게 일으킨 교란, 그 총체적 효과의 일부분이 재난의 형태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그 어떤 행위, 물질대사, 물리 화학적 작용도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기후변화는 물론 대기의 조성, 심지어 하늘의 푸르름마저도 온갖 존재자들이 우발적으로 함께 만들어내고 변화시키기를 무구히 반복하는 과정에 놓여있는 일시적인 생산물이다. 자연적, 물리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근대적 자유의 이미지는 인간만의 망상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그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하거나 그것을 극복한 적이 없다.


  제국주의, 자본주의와 문화 활동의 상호작용에 주목하고, 비서구적 관점으로 탄소경제와 기후변화를 다룬 이 책의 독창성과 탁월함은 저자의 이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시는 탈식민기의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영국에서 사회인류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평생 현대 문명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긴 소설을 써온 작가다. 이 책은 그가 평생 떨쳐낼 수 없었던 것들에 직면하여 끈질기게 사유와 탐구를 이어온 결과다. 인류세의 문화적 지층, 그 가장 깊은 곳에서 퍼 올려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대혼란'의 증거다.


  책을 덮고 나니 이 불온하고 불길한 시절, 도처에서 보이 대혼란의 징표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기후변화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 자체가 범죄나 다름없는 고성능 슈퍼카에 대한 선망을 부추기는 영상들. 허구헌 날 날라 오는 H&M의 할인쿠폰, 극심한 폭염과 가뭄으로 곳곳에서 농작물이 말라죽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곡물 가격 급등, 농산물 ETF 수익률 ’훨훨‘”이라는 제목의 경제지 기사, 기후재난의 파국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IPCC의 6차 평가보고서와 기후 위기는 곧 (대기업이)돈을 벌 기회라고 말하는 광복절 대통령 경축사의 괴리, 탈레반과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 대해 쏟아지는 이야기들과 2018년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극심한 가뭄으로 발생했던 371,000명의 난민들에 대한 과거의 무관심이 상기시키는 모순 같은 것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문화는 위기에 직면하는 기술"이라는 명쾌한 정의를 생각해보면 이 시대의 문화는 기후 위기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우리가 80년대의 흡연문화를 보고 경악하듯, 미래세대가 이 시절을 들여다본다면 분명 경악하고 진절머리를 칠 것이다.


  어쩌면 바이러스와 날씨의 눈치를 살피며 바짝 엎드려 숨어 지내야 하는 2021년의 이 시간이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항상 눈앞에 두고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들, 이 ‘대혼란’의 징표들이 가리키는 방향의 끝에는 길고 고통스러운 파국의 시간과 자멸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 말이다.

  우리가 아프게 우리의 과오와 실패, 외면과 몰지각에 직면할 수 있다면, 끈질긴 고민과 투쟁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을 단서로 다른 방식의 삶과 생존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문화를 새롭게 고안해내는 지난한 실천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3차 유행이 감소세에 접어든 어느 밤이었다. 아버지와 술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아버지는 젓가락으로 생선조림을 헤집다 말고 불현듯 말을 꺼냈다.

“내가 어릴 때 조기 내장 가지고 끓인 매운탕 먹는 걸 그렇게 좋아혔는디, 이제는 다 못 먹는 게 되어부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 탓인가 싶기도 허다.”

“왜요? 미세 플라스틱 땜에?”

“아빠가 평생 헌 일이 그거 아니냐. 공장에서 작업 끝나고 물청소 싸악 허면 하수도로 그냥 흘러들어가는 분진이 어마어마혀. 그거 보고 있응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먹고살라고 헌 일인디 게 다 세상에 죄짓는 일이었나 싶고...”

  아버지는 20대 초반에 전주의 어느 공장에 취직해서 몽키스패너로 머리통을 맞아가며 기술을 배운 이후로 30년 넘게 플라스틱 사출 성형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이쑤시개부터 냉장고 부품까지 플라스틱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다 만들어봤다고 했다. 이 일로 독립해서 자리 잡고, 자기 앞가림하고, 평생 식구들 먹여 살렸는데, 그게 세상에 죄짓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의 심정이란 무엇일까? 그 혼란과 당혹감을 나는 모른다.

  전라도 시골, 가난한 농사꾼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아버지에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삶의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험한 공장 생활과 기계공이 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말없이 빈 잔에 술을 따르며 회한과 죄책감이 뒤섞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 유년시절의 풍경에 보이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 조각들이 촘촘히 박혀있었음을, 그 풍경의 뒤편에는 줄줄이 늘어선 수십 수백만 개의 플라스틱들이 있었음을 이제야 알다. 나 역시 이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낚시가 취미인 아버지는 짐 싣기 편하다는 핑계로 1톤 트럭을 끌고 낚시를 가서는 다음날 짐칸 한가득 쓰레기를 담아와 근무하는 공장 분리수거장에 버리고 오곤 한다. 나는 그것이 의도치 않았던 자신의 과오에 대한 아버지 나름의 속죄이자, 앞 세대로서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무언의 메시지라는 생각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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